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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코리아뉴스 | 미 제국의 두 기둥 - 전쟁과 기독교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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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9-22 03: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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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제국의 두 기둥 - 전쟁과 기독교 - 4

미제국의 출범과 확장                                                                                                   최천택. 김상구 공저

아메리카 제국주의

아메리카 제국(American Empire) 또는 미 제국(美帝國)은 아메리카 합중국(미국)의 정치적·경제적·군사적·문화적 영향력을 나타내는 용어다. 미 제국의 개념이 일반화된 것은 미국의 제11대 대통령 포크(James K. Polk, 1795-1849)가 1846년, 멕시코-미국전쟁을 일으키고 캘리포니아, 개즈던(Gadsden) 등을 매입하면서 부터였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 독점 단계라고 정의한 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 질서를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 신보수주의자들이 추진하는 미국의 공격적인 정책에 반대할 때 이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영국의 경제학자 홉슨(John Atkinson Hobson, 1858-1940)이 저서『Imperialism』에서 미국 제국주의의 원인에 경제적 해석을 시도한 바 있다. 특히 미국 혁신주의 학파의 상징인 버드(Charles Beard)는 자본가 세력과 공화당과의 관계에 주목했다. 당시 유럽의 보호관세 정책으로 유럽으로의 진출이 막히자 공화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자본가들은 정책 변환을 시도하여 중국·태평양·중남미 등으로 시야를 돌렸다고 해석한 것이다.

 

거론한 학자들 이외에 아메리카 제국주의론을 제기하는 학자들 대부분은 미제국의 출발선을 멕시코-미국 전쟁 혹은 스페인-미국 전쟁으로 본다. 그러나 건국 초기부터 미국인들은 팽창주의를 선택했으며 ‘제국’을 수립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다수 있다. 주목할 학자로는 윌리암스(William A. Williams, 1921–1990)가 있다. 윌리암스는 미국의 대 스페인 전쟁을 돌출된 하나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미국 사회가 갖고 있는 역사적 배경에서 찾는 시도를 하였다.

 

“미국인들은 건국 당시부터 미국을 하나의 제국으로 생각했는데, 이것은 미국의 독립혁명 당시에 절정을 이루었던 독단적 자아의식의 한 부분이었다. … 이런 주장은 일단 놀라운 것일지 모르나, 실제로 제국으로 보는 사고방식이 건국 초부터 우세했다는 사실은 이상할 것도 설명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많은 제국들이 경합하던 시대에 대영제국의 일원으로서 성장해온 식민지인들이 일단 본국과 대립하게 되면서 그러한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윌리암스는 ‘제국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선진 산업 국가가 더 취약한 나라의 경제 개발에 대해 지배적이고 일방적인 역할을 하거나 하려고할 때 이 강대국의 정책은 '제국주의'다.”

 

제국주의(imperialism)란 한 나라가 무력·정치·경제와 문화적으로 다른 지역이나 정치적 영역을 팽창하거나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제국주의라는 용어는 후진국들이 제국주의를 하고 있는 강대국을 제국(empiire)이라 부르며, 제국의 지배자를 황제(emperor)라 부른다.

 

 

제국주의의 형용사는 imperial이다. 제국주의라는 용어는 지배와 착취를 당하고 있는 후진국들이 제국주의를 하고 있는 강대국을 비난하기 위하여 쓴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무력과 위용을 과시하기 위하여 스스로 사용한 용어다. 일본제국주의들이 조선을 강제로 병탄하고 식민지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대학을 세우고 경성제국대학이라고 명칭을 붙인 데서도 알 수 있다. 제국들은 무력과 위세를 과시하고 자원을 활용하기 위하여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 도서관 등을 세워 자국민들을 격려하고 우월감을 갖도록 하여 제국주의를 합리화 하는데 활용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영국은 제1차 아편전쟁(1839-1842)이 끝난 직후인 1848년,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인도 소재 동인도 회사를 통해 스코틀랜드 식물원 연구원 출신인 포춘(Robert Fortune, 1812-1880)을 중국에 보내 차나 은을 훔쳐오게 했다. 이 차를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와 실론(현재 스리랑카)에서 재배하고 개량하여 막대한 수확을 얻었고 중국은 주요 수출품목 하나를 잃게 되었다.

 

미 제국의 시작

미국은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학살과 수탈에 그치지 않고 원주민을 속이기까지 하는 만행 끝에 미국토의 겨우 2.3%만을 인디안 보호지역으로 남겨주고 전국토의 97.7%를 강탈하였다. 1803년 나폴레옹은 전쟁비용이 부족해지자 미본토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미국 중부 지역의 프랑스 식민지를 미국에 판매하였다. 이를 루이지애나구매(Louisiana Purchase)라 부른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지역은 프랑스의 루이(Louis)14세의 땅이라는 의미다. 이 지역의 넓이는 2,120,000 ㎢로 우리나라 전체 면적(222,154㎢)의 10배나 되는 땅이다. 이 넓은 땅을 겨우 1천 5백만 달러에 사들였다. 1㎢ 당 7달러의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이 지역은 현재 루이지애나, 미주리, 아칸소, 아이오와,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네브래스카, 오클라호마, 캔자스, 콜로라도, 와이오밍, 몬태나, 미네소타 주로 나뉘었다.

 

그리고 1846년부터 1848년까지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나머지 미국토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서부 지역을 빼앗아 영토를 넓혀 강대국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 침략전쟁은 정치가들뿐만 아니라 많은 미국 시민들도 이 제국주의 전쟁에 기꺼이 참가한다. 예를 들면, 5만 명의 지원병을 모집하는데 20만 명이 지원하여 침략주의의 광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같은 양심적인 사림들은 매우 불의한 침략 전쟁이라고 이 전쟁을 규정하며 비난하였다. 소로우는 그 뒤에『시민 불복종의 의무』등의 저서를 통해 비폭력 저항을 강조하였다. 이 책은 인도의 간디(1869-1948)와 러시아의 톨스토이(1828-1910) 등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의 남북전쟁에서, 공업지역인 북군이 승리함으로써 영토와 공업을 기반으로 제국의 조건을 갖추게 된다. 그다음 1867년도에는 러시아로부터 알라스카를 사들임으로써 제국의 기반을 더욱 굳건하게 다져나간다. 알라스카는 구석기시대(약 12,000 B. C.)때 아시아 계통의 사람들이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41년 덴마크의 항해가이며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Jonassen Bering, 1681-1741)이 러시아 황제의 명으로 북태평양을 탐험하다가 알라스카에 도달하였다. 이후 러시아와 미국의 모피상들이 진출하여 사업을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영국 같은 나라가 이곳을 점령할지 모른다는 우려와 모피산업의 쇠퇴, 그리고 결정적으로 러시아의 재정 악화로 1867년 미국의 국무장관 시워드(William Henry Seaward, Sr.(1801–1872)와 합의하여 7,200,000 달러에 매각하였다. 면적이 1,522,596km2(587,878 평방마일)로 한반도의 7.5배에 해당하는 넓은 땅이다.

 

그 결과 원주민 인디언들과 에스키모들은 새로운 국경으로 이산가족이 되기도 했다. 특히 냉전 시대에는 지척에 살고 있는 가족이나 친척도 국경에 막혀 만나지 못하는 비극을 겪었다.

 

하와이왕국 강제병탄

미 제국의 마각은 이미 멕시코전쟁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미국 본토를 벗어난 본격적인 침략은 하와이왕국의 강제병탄으로 본격화되었다. 라이트(Harrison M. Wright)는 그의 편저 신제국주의에서 제국주의의 앞잡이는 탐험가, 개척자 또는 선교사(explorers, pioneers, or missionaries)이고 뒤를 이어 군함들이 쳐들어온다고 했다. 이런 사실은 하와이왕국의 강제병탄이 선교사와 그 후손들에 의하여 이루어짐으로써 입증되었다.

 

하와이는 카메하메하 1세(Kamehameha I, c. 1758-1819, 재위 1795–1819)가 1795년 하와이왕국을 세우고 대를 이어 왕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 등 여러 나라는 하와이를 합법적인 독립국가로 인정하였다.

 

1820년부터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본부를 둔 회중교회(현재 명칭: United Church of Christ)가 하와이에 선교사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1850년까지 100명 이상의 선교사들을 보냈다. 선교사들의 구호 3G(Gospel, Gold, Glory)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gospel과 glory는 명분일 뿐 진짜 목적은 돈(gold)이었다. 선교사들과 그 후손들은 하와이의 사탕수수 밭에서 엄청난 수입을 얻게 되었다.

 

이 이권을 독점하고 영속시키기 위하여 선교사의 자식들(The Missionary Boys)은 단순히 대농장의 소유주일 뿐만 아니라 정치세력도 겸하게 되었다. 또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하여 하와이 왕국의 왕권을 찬탈하고 미국에 합병시켰다.

 

이 음모에 주요한 역할을 한 자는 선교사의 손자로, 소위 선교사의 자식(Missionary Boy)인 설스톤(Lorrin Andrews Thurston, 1858–1931)이었다. 그의 친가와 처가가 모두 선교사의 후손이다. 그는 정치가·변호사·언론인이었는데, 불법적일뿐만 아니라 비신앙적이고 비양심적인 인물의 전형이었다.

 

사탕수수밭으로 부자가 된 그는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하와이의 마지막 왕인 8대 여왕 릴리우오칼라니(Liliuokalani, 1838-1917, 재위: 1891년 1월 29일–1893년 1월 17일)의 왕권을 무력으로 찬탈하고 하와이를 미국에 합병시켰다. 이들은 1887년 백인 농장주들로 구성된 하와이 연맹(Hawaiian League)이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총으로 무장했다. 그들은 왕을 위협하여, 왕의 통치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헌법이라는 걸 만들어 서명하게 만들었다.

 

총검으로 위협하여 만들었다고 해서 대검헌법(Bayonet Constitu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로 인해 왕은 통치권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원주민들은 투표권을 박탈당했다. 왕은 백인 폭도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릴리우오칼라니는 189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병 치료를 받다가 사망한 7대 왕 ‘칼라 카우아’의 누이동생이었다. 그녀는 1891년 1월 29일 마지막 8대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여왕은 즉위하자 대검헌법을 무력화하고 왕권을 회복하려 노력하였으나, 설스톤 일당은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소위 전위원회(Safety Committee)라는 비밀조직을 운영하며, 대검헌법을 근거로 불법적인 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선교사의 자식인 샌포드 돌(Sanford Dole, 1877-1958)을 대통령에 임명하였다. 이 자로 말하자면 선교사의 아들일 뿐 아니라 대농장주였다.

 

 

릴리우오칼라니( Lili'uokalani) 하와이 여왕

 

그 후 그는 돌 파인애플회사(Dole Pineapple Company)를 세워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이 회사는 현재 돌 식품회사(Dole Food Company)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연매출 수십억 달러의 큰 회사가 되었다. 우리가 먹는 파인에플 통조림 하나하나에도 하와이 원주민의 한이 서려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먹고 있을 따름이다.

 

여왕과 백인 조직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자 하와이 주재 미 대표(현재 대사와 유사한 직책)였던 스티븐스(John Stevens, 1820–1895)는 항구에 정박 중이던 미 군함 보스턴(USS Boston)에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허위 전갈을 보내 162명의 해병대가 대포와 기관총으로 중무장하고 상륙하도록 하여 하와이 여왕을 무력으로 제압하였다.

 

그는 극단적인 팽창주의자로 미국법과 국제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이 만행을 저질렀다. 1893년 그가 미 국무성에 보낸 문서에서 “하와이라는 배가 아주 잘 익었다. 지금은 미국이 이 배를 딸 최적기이다.” 라고 보고하기도 했다. 병력과 장비에서 매우 열세인 하와이 여왕은 이들 해병대가 쳐들어오는 걸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셜스톤 일당이 음모를 꾸민지 32일 만에 하와이는 미국에 합병되고 만다. 미국 대표였던 스티븐스는 자신이 저지른 이 합병을 미국정부를 대신해 공인하였다. 셜스톤과 그 일당은 워싱턴으로 가서 병합을 승인받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 출신의 제24대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 1893-1897재임)는 오히려 이 불법적인 사건의 조사를 명령했다. 스티븐스는 하와이 왕국의 하와이 국기를 내리고 미국 국기를 계양하고 여왕을 재판에 회부하는 등의 횡포를 저질렀다. 하지만 곧 클리블랜드의 임기가 끝나고 태프트를 필리핀의 총독으로 임명하는 맥킨리가 대통령이 되자 하와이의 합병을 공식화하였다. 맥킨리 대통령은 돌(Dole)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미국은 하와이 침략 100주년인 1993년 11월 23일, 103차 양원합동 결의문 19호(공법 103-105, Public Law 103-105)에 따라 하와이왕국 침략 행위를 사과했다. 약 3쪽에 달하는 결의문에서 그 과정과 불법성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얼핏 생각하면 그래도 미국은 상당히 양심적인 국가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미국은 너무나 많은 나라를 침략하고 고통을 준데 대해서는 전혀 사과나 배상을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하와이에 대해서는 상하 양원이 왜 결의문까지 내면서 사과했을까? 이미 하와이는 식민지 시절을 지나 1959년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이제 영토문제나 배상문제는 없어졌다. 원주민들에 대한 배상 문제도 희박해졌다. 2008년도 인구 통계에 따르면 하와이 인구 구성은 다음과 같다.

 

필리핀계(175,000명),일본계(161,000명),히스패닉(110,000명),하와이 원주민(70,000명),중국계(53,000명),한국계(40,000명),푸에르토리코계(35,000명)

미국은 이 통계를 인용하며 원주민에게 보상이나 책임질 일 없이 전 세계를 향하여 마치 자신들이 양심적인 국가인 것처럼 가장하는 자료로 삼았다. 5대륙에 걸쳐 미국의 침략이나 공격을 받은 나라는 우리나라를 위시하여 너무나 많다. 미국은 영토문제와 배상 등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지만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할 의지는 전혀 없다. 아래에 건국 초기부터 시작된 미국의 팽창 과정을 표로 정리해보았다.

 

내 역
    

시 기
    

비 고

독립당시의 13개주

(워싱턴 D.C.포함,)

(기존에 거주하던 아메리카 토착민들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획득)
    

1776
    

워싱턴 D.C.

조지아 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노스캐롤라이나 주

버지니아 주

메릴랜드 주

델라웨어 주

펜실베이니아 주

뉴저지 주

뉴욕 주

코네티컷 주

로드아일랜드 주

매사추세츠 주

뉴햄프셔 주

미국 동부 영토

(기존에 거주하던 아메리카 토착민들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획득)
    

1776-
    

버몬트 주

켄터키 주

테네시 주

오하이오 주

인디애나 주

미시시피 주 중 북위 31도선 이북 지역

일리노이 주

앨라배마 주 중 북위 31도선 이북 지역

메인 주

미시간 주

위스콘신 주

미네소타 주 중

미시시피 강 동부

웨스트버지니아 주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나폴레옹에게 헐값에 인수함)
    

1803-
    

오클라호마 주 대부분

캔자스 주 대부분

아이오와 주

미네소타 주 중

미시시피 강 서부

루이지애나 주

미주리 주

노스다코타 주

사우스다코타 주

네브래스카 주

아칸소 주

와이오밍 주 일부

몬태나 주 일부

콜로라도 주 동부

스페인령 동 플로리다와

서 플로리다
    

1815-
    

루이지애나 주 일부

미시시피 주 일부

앨라배마 주 일부

플로리다 주

텍사스 공화국
    

1836-
    

뉴멕시코 주 중

리오그란데 강의 동부

와이오밍 주의 일부

캔자스 주의 일부

오클라호마 주의 서부

텍사스 주

콜로라도 주의 일부

영국령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일부분
    

1846-
    

아이다호 주

오리건 주

워싱턴 주

몬태나 주의 일부

와이오밍 주의 일부

멕시코의 영토 일부분
    

1848-
    

캘리포니아 주

네바다 주

유타 주

와이오밍 주 일부분

애리조나 주

뉴멕시코 주 중

리오그란데 강의 서부

콜로라도 주 일부

러시아로부터 매입
    

1867-

1959
    

알래스카 주

스페인-미국 전쟁
    

1898
    



(현재 미국의 준주)

1898-

1946
    

필리핀(현재 독립국)

1898-

1952
    

푸에르토리코(현재

미국의 자유 연합 주)

1899-

1909
    

쿠바(현재 독립국)

하와이 왕국 병탄
    

1899-

1959
    

하와이 주

 
    

1900-
    

아메리칸 사모아

(현재 미국의 준주)

 
    

1903-

1999
    

파나마운하 지대

(현재 파나마에 반환)

 
    

1916-

1922
    

도미니카 공화국

(현재 독립국)

 
    

1917-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현재 미국의 준주)

태평양의 신탁통치령 제도
    

1944-

1990
    

마셜 제도

(현재 독립국)

미크로네시아 연방

(현재 독립국)

팔라우(현재 독립국)

북마리아나 제도

(현재 미국의 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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