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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예감 407] 재앙 불러온 포츠담의 검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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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8-17 12:3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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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예감 407] 재앙 불러온 포츠담의 검은 그림자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자주시보

<차례>

1. 포츠담선언 발표 이전의 상황

2. 포츠담선언 발표 이후의 상황

3. 파죽지세의 진공작전

4. 딘 러스크가 날조한 거짓말

5. 민족분렬재앙은 미국이 저지른 만행 

 

 

1. 포츠담선언 발표 이전의 상황

 

75년 전, 8월 15일 일본제국은 패망했고 식민지조선은 해방되었다. 1945년 8월 15일은 수요일이었다. 그날 아침 서울 시내 곳곳에 벽보가 나붙었다. 당일 정오에 중대방송이 있을 것이므로 “1억 국민이 필청(必聽)하라”는 벽보였다. 그들이 말한 1억 국민은 당시 일본제국 인구에 더하여 일본제국이 식민지로 강점한 조선반도, 남사할린, 중국의 대만과 랴오닝반도 남부의 인구를 모두 합한 총인구를 뜻한다. 

 

벽보에서 필청하라고 했던 중대방송은 일왕 히로히또(裕仁)의 녹음방송이다. 1945년 8월 14일 밤, 히로히또는 도꾜에 있는 자기 거처에서 ‘천황의 조서(詔書)’라는 것을 육성으로 녹음했는데, 그것을 라디오방송을 통해 세상에 알리려는 것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경성방송국은 히로히또의 조서낭독녹음을 방송했다. 경성방송국은 조선총독부가 1926년 11월에 설립한 라디오방송국이다. 일본제국은 서울을 경성이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들은 1945년 8월 15일 일왕이 라디오방송을 통해 항복선언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히로히또가 낭독한 것은 항복서가 아니라 조서였다. 원래 조서는 왕의 명령을 백성들에게 하달하는 왕실문서다. 그날 라디오방송을 통해 전해진 히로히또의 조서는 가와다 미즈호(川田瑞穗)가 현학적인 고어체로 작성한 약 800자의 장문이었기 때문에, 고전문장에 익숙한 일본인들이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당시 경성방송국 취재기자였던 문제안의 회고담에 따르면, 전파송출상태가 나빠서 히로히또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히로히또의 조서를 방송으로 내보낸 직후, 경성방송국 제1보도과 계장 후꾸다(福田)가 조서를 일본말로 다시 방송했고, 조선인 방송원 이덕근이 조선말로 번역된 조서를 다시 방송했다고 한다. 문제안의 회고담에 따르면, 그날 오후 경성방송국은 히로히또의 조서를 그런 식으로 몇 차례 되풀이하여 방송했고, 조서내용에 대한 해설방송도 했다고 한다. 서울시민들은 1945년 8월 15일 오후에 방송된 해설을 듣고서야 일본제국이 패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놀라운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삽시에 퍼져나갔다. 그렇게 되어 1945년 8월 16일 아침부터 조선 민중들은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다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외치는 격정의 만세소리는 삼천리금수강산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당시 우리 민족은 패망한 일본제국의 배후에 음흉한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음흉한 그림자의 정체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식민지조선을 일본제국의 식민통치에서 해방시키려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분할하려는 흉계를 일찌감치 꾸몄고, 그 흉계를 행동에 옮길 결정적인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서에서 히로히또는 항복의사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짐은 제국의 정부로 하여금 열강들의 공동선언 조항들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게 했노라”라고 언급했다. 히로히또가 조서에서 언급한 공동선언이라는 것은 1945년 7월 26일에 발표된 포츠담선언(Potsam Declaration)이다. 포츠담은 도이췰란드 베를린 근교의 지명이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진행된 포츠담회의에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 소련공산당 서기장 스딸린이 악수하는 장면이다. 포츠담회의에서 발표된 포츠담선언에서 연합국들은 일본제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촉구했다. 또한 포츠담회의에서는 종전문제와 전후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민족사적 관점에서 8.15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조선인민혁명군이 8.15 직전 함경북도에서 전개한 조국해방전투상황을 고찰해야 하고, 세계사적관점에서 8.15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포츠담회의의 내막을 살펴보아야 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포츠담선언 제13항이다. 그 마지막 조항에는 “우리는 모든 일본군이 당장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그로써 적절하고 온당한 선의(good faith)를 확약할 것을 일본 정부에게 촉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에게는 즉각적이고 철저한 파괴만이 차례질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것은 일본제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촉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왕 히로히또가 조서에서 공동선언을 수락하겠다고 언급한 것에 항복의사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는 포츠담선언이라고 명시하지 않고 열강들의 공동선언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사용하여 항복의사를 은폐한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그런 은폐가 언술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항복문제를 놓고 찬반격론을 벌인 일본제국 전쟁지휘부의 내부분렬을 반영한 것이고, 그와 더불어 종전문제를 놓고 미국과 소련을 각각 상대한 일본제국의 막후교섭사정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항복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제국 전쟁지휘부가 내부분렬을 겪은 내막을 살펴볼 필요가 있고, 종전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제국 전쟁지휘부가 막후교섭을 벌인 내막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5년 6월 전황은 일본제국에게 매우 불리해졌다. 일본제국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소련에게 중재를 부탁하는 막후교섭을 시도했다. 당시 소련은 일본제국과 불가침협정을 맺은 중립국이었으므로, 중재를 부탁할 나라는 소련밖에 없었다. 1941년 4월 13일에 체결되어 5년 동안 효력을 유지하는 소일불가침조약이 만료되는 날은 1946년 4월 13일이었다. 

 

1945년 6월 30일 일본제국 수상 스즈끼 간따로(鈴木貫太郞)는 당시 모스크바에 주재하는 일본제국 대사 사또 나오다께(佐藤尙武)를 통해 소련에게 중재를 부탁하는 막후교섭을 제안했다. 하지만 소련은 그 제안에 즉답을 주지 않고, 지연전술로 대응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하루가 급한 일본제국은 조바심을 느꼈지만, 소련 외무상 봐쩨슬라브 몰로또브(Vyacheslav Molotov)는 열흘 동안 시간을 끌다가 사또 나오다께를 1945년 7월 11일에 만났다. 

 

소련은 일본제국의 막후교섭제안에 즉답을 피하고 시간을 끌다가 마지못해 응해주는 척하였으므로, 몰로또브와 사또가 만난 회동에서 어떤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회동에서 몰로또브는 전쟁이 일본제국에게 유리하게 끝날 수 있을 것 같은 예상을 사또에게 말해주었다. 소련의 그런 행동은 대일전쟁준비시간을 벌기 위한 기만전술이었다. 소련은 1945년 5월 8일 나치 도이췰란드가 항복한 직후 유럽전선에 전개했던 방대한 규모의 전투병력, 무장장비, 군수물자를 수송렬차편으로 약 10,000km떨어진 원동전선까지 이동시켜 대일전쟁을 준비하는 중이었으므로, 수송작전을 완료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소련의 기만전술에 넘어간 일본제국은 전쟁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끝날 수 있을 것으로 오판했다. 그런 오판에 빠진 일본제국은 항복준비가 아니라 결전준비에 더욱 미쳐 날뛰었다.  

 

미국은 일본제국 수상 스즈끼 간따로와 일본제국 대사 사또 나오다께가 주고받는 도꾜-모스크바 사이의 암호전문을 계속 도청하고 있었다. 1995년에 출판된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옥스퍼드 입문서(The Oxford Guide to World War II)’라는 제목의 책에 따르면, 미국의 암호해독요원들은 도꾜와 모스크바를 오간 일본제국의 암호전문을 해독하기까지 1주일도 걸리지 않았고, 어떤 암호전문은 입수한 당일 곧바로 해독했다고 한다. 미국은 일본제국의 암호전문을 해독하여 일본제국이 항복하지 않고 전쟁을 계속하려는 의지를 가졌음을 파악했다.   

 

 

2. 포츠담선언 발표 이후의 상황

 

미국, 일본, 소련이 제각기 급박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시간은 흘러갔고, 1945년 7월 26일 일본제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포츠담선언이 발표되었다. 포츠담선언이 발표되자, 일본제국 최고전쟁지도회의는 긴급대책을 세워야 했다. 최고전쟁지도회의 구성원은 6명인데, 수상 스즈끼 간따로, 외무상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전쟁상 아나미 고레지까(阿南惟幾), 해군상 요나이 미쯔마사(米內光政),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郞), 해군참모총장 도요다 소에무(豊田副武)가 그들이었다. 

 

일본제국 최고전쟁지도회의 6인방은 포츠담선언을 수락하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를 놓고 오랜 시간 설왕설래한 끝에 그 선언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이른바 ‘국체호지(國體護持)’를 인정하는 내용이 포츠담선언에 들어있지 않다는 해괴한 이유를 들어 포츠담선언을 거부한 것이다. ‘국체호지’라는 것은 ‘천황제’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1945년 7월 28일 일본제국은 포츠담선언을 “묵살(黙殺)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일본제국이 항복하더라도 ‘천황제’는 종전대로 유지시킨다는 조항이 미국이 제출한 포츠담선언 초안에 들어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민족과 동아시아 나라들에게 침략전쟁과 식민지강점의 만행을 저지른 최고전범 히로히또를 처벌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의도는, 전범국 일본을 남북으로 분할하지 않고, 피해국 조선을 남북으로 분할하려는 간악한 흉계와 직결된 것이었다. 

 

포츠담회의에서 소련과 영국은 ‘천황제’를 종전대로 유지시키려는 미국의 의견에 반대했고, 그 조항은 삭제되었다. 그렇게 되어, 포츠담선언 제10항에는 “모든 전범들에게 준엄한 심판(Stern justice)을 내린다”라는 모호한 문장이 들어갔다. 미국은 모호하게 규정된 제10항을 근거로 최고전범 히로히또를 처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범처벌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준엄한 심판’을 적당히 끝냈다. 극형을 받았어야 마땅한 일본제국의 전범들을 끼고돌았던 미국의 간악한 전범처리정책 때문에, 7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일본은 침략전쟁과 식민지강점에 대해 사죄하지 않고, 되레 자기들의 침략전쟁과 식민지강점을 합리화하는 후속범죄를 계속 저지르고 있다. <사진 2>  

 

▲ <사진 2> 위의 사진은 미국, 소련, 영국이 포츠담회의를 진행하는 장면이다. 포츠담회의는 미국, 소련, 영국이 진행했지만, 포츠담선언에는 미국, 영국, 중국(장졔스 정부)이 서명했다. 그렇게 된 까닭은, 당시 소련은 일본제국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중립국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불가침조약이 유효한 조건에서 소련은 일본제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에 서명할 수 없었다. 소련은 나중에 포츠담선언에 서명했다.  

 

1945년 7월 30일 소련군의 전투병력, 무장장비, 군수물자를 유럽전선에서 원동전선으로 옮기는 마지막 수송렬차가 원동지역에 도착했다. 그로써 소련의 대일전쟁준비는 사실상 완료되었다. 마지막 수송렬차가 원동지역에 도착한 바로 그날, 모스크바 주재 일본제국 대사 사또는 일본제국 수상 스즈끼에게 보낸 암호전문에서 “만일 우리가 소련의 참전을 막지 못하면,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항복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을 것”이라고 썼다. 이런 사정은 일본제국에게 가장 두려운 세력이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음을 말해준다. 일본제국의 대소공포증은 그들의 대미적대감을 완화시켰다.   

 

미국은 소련의 전투병력, 무장장비, 군수물자가 유럽전선에서 원동전선으로 이동배치되어 대일전쟁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시하면, 만주를 점령하고 곧바로 조선반도로 남진할 것이고, 그와 더불어 남사할린을 탈환하고 곧바로 일본 홋까이도에 상륙할 것으로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2개월 3주 동안 미국군이 20,000여 명이나 전사하는 격전 끝에 일본 오끼나와를 간신히 점령한 미국군이 수송함을 타고 북상하여 조선반도와 일본 규슈에 상륙하려면, 작전시간이 1개월 이상 필요했지만, 소련-만주국경과 몽골-만주국경을 동시에 돌파하여 세 방면에서 총공격을 시작한 소련군은 1945년 8월 말까지 식민지조선을 해방하고 일본 홋까이도를 점령할 수 있었다. 소련군의 대일전쟁씨나리오는 일본과 조선반도를 점령하려고 벼르던 미국에게 악몽으로 다가왔다. 

 

미국이 그런 악몽을 떨쳐버리려면,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전하기 전에 미국의 주도로 전쟁을 속결해야 했다. 그래서 미국은 핵시험 직후 실전배치를 앞둔 핵폭탄을 서둘러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국군 B-29 폭격기가 일본 히로시마에 첫 번째 핵폭탄을 떨어뜨렸다. 히로시마 전체가 핵참화로 불타고 있던 시각, 기고만장해진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은 대일협박성명을 발표했다. “만일 그들이 우리의 조건을 당장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들은 이 지구상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파멸의 비가 하늘에서 내리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핵폭탄으로 히로시마를 날려버리면 일본제국이 곧바로 항복할 것이라던 트루먼의 예상은 빗나갔다. 일본제국은 히로시마가 완전히 폐허로 되는 대참화를 당했으면서도 항복하지 않고 계속 버텼다. 

 

 

3. 파죽지세의 진공작전 

 

전쟁준비를 완료한 소련은 1945년 8월 9일 대일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일본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원동지역으로 집결한 소련군은 만주와 남사할린에서 파죽지세로 일본군을 격파하며 노도같이 진격했다. 이 충격적인 소식이 도꾜에 전해진 때는 당일 오전 4시였다. 

 

일본제국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만주를 소련에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남사할린이 소련군에게 점령당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남사할린을 점령한 소련군은 약 1,300km의 바다 위에 늘어선 쿠릴렬도를 징검다리처럼 건너 곧바로 일본 홋까이도 북부해안에 상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계 미국인 역사학자 하세가와 즈요시(長谷川毅)는 2005년에 출판된 ‘대적경쟁: 스딸린, 트루먼, 그리고 일본의 항복(Racing the Enemy: Stalin, Truman,\and the Surrender of Japan)'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당시 소련이 홋까이도를 점령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서술했다.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한 날, 10만명 병력으로 편성된 소련군 제16군은 남사할린으로 진격했다. 2013년 5월 30일 미국 외교전문지 ‘외교정책(Foreign Policy)’에 실린, 핵안보연구자 워드 윌슨(Ward H. Wilson)이 집필한, ‘일본을 패배시킨 것은 원폭이 아니라 스탈린’이라는 제목의 글에 따르면, 소련군 제16군은 10일 만에 남사할린을 탈환하고 곧바로 일본 홋까이도에 상륙하는 작전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소련군이 만주와 남사할린에서 파죽지세로 진격하고 있었던 1945년 8월 9일 오전 10시 30분, 공포에 빠진 도꾜에서 최고전쟁지도회의가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했다. 그런데 비상대책회의에서 포츠담선언을 수락하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찬반격론이 벌어지고 있던 바로 그 시각, 두 번째 핵폭탄을 실은 미국군 B-29 폭격기가 일본 나가사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폭격기는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끼 상공에서 핵폭탄을 투하했다. 나가사끼도 히로시마처럼 핵참화를 입었다. 히로시마 군수공장들과 나가사끼 군수공장들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들이 핵참화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소련의 대일전쟁개시와 미국의 나가사끼 핵폭탄 투하가 겹치면서 사상 최악의 위급한 상황이 조성되었는데도, 일본제국 최고전쟁지도회의 6인방은 투항파와 항전파로 3명씩 갈라져 말싸움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당일 오후 2시 30분 전시내각 전원회의가 진행되었으나, 그들도 투항파와 항전파로 갈라져 말싸움을 벌였다. 종내 결론을 내지 못하자, 일왕 히로히또가 직접 나서서 항복결정을 내렸다. 

 

이튿날인 1945년 8월 10일 이른 아침, 일본제국 외무성은 스위스를 통해 미국에게 긴급전문을 보냈다. 일본제국 외무성이 소련에게는 긴급전문을 보내지 않고 미국에게만 보낸 것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과 거래하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었다. 일본제국 외무성은 긴급전문에서 “천황의 대권을 손상시키는 어떤 조건도 없다면”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겠노라고 하면서 조건부 항복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포츠담선언에서 일본제국에게 요구한 것은 조건부 항복이 아니라 무조건 항복이었다. <사진 3>

 

▲ <사진 3> 위의 사진은 1945년 8월 만주해방전투에 참가한 소련군 전투원들이 헤이룽장성 하얼빈을 해방하고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의 대일선전포고로 시작된 만주해방전투는 8월 20일까지 계속되었다. 소련군은 만주해방전투에 전투병력157만명, 야포 27,000문, 방사포 1,150문, 전차 및 자행포 5,500대, 작전기 3,720대를 동원했다. 만주해방전투에서 소련군은 12,000여 명이 전사했고, 일제 관동군은 83,700명이 전사했으며, 약 600,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로써 일제 관동군은 궤멸되었다. 만주해방전투에는 몽골군도 참전했다.  

 

숨막히는 대격변이 줄이어 일어나는 동안, 기세충천한 소련군은 만주와 남사할린에서 각각 일본군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남진했고, 김일성 사령관이 지휘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은 함경북도 각지에 대기 중이던 국내인민무장대들과 함께 일본군 군사거점들을 격파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1945년 8월 12일 조선인민혁명군은 라진인민무장대의 호응을 받으며 함경북도 라진(오늘의 라선)에 있는 일본군 거점들과 식민통치기관들을 공격했다. 라진해방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라진해방전투에 참가한 소련군 제25군 지휘관 우르쥬멜라슈월리는 <조선에서의 수기>라는 제목의 책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들은 조선빨찌산들이 일본군의 퇴로를 막고 그들이 도시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들과 빨찌산들 사이에 갇힌 일본 사무라이들은 무기를 내던지고 포로로 잡히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도시외곽에서 우리쪽으로 급히 달려오는 100여 명의 무장대오와 조우했다. 그들의 지휘관은 아군 땅크부대 대령에게 ‘우리들은 김일성빨찌산 대원들입니다’라고 말했다.”   

 

미국은 소련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의 급속한 진격을 보면서 당황했지만, 일본제국에 또 다시 투하할 핵폭탄을 미처 만들지 못했다. 당시 미국은 일본제국이 항복하지 않고 계속 버티는 경우,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이어 삿뽀로와 하꼬다떼에도 핵폭탄을 투하할 공격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삿뽀로와 하꼬다떼는 홋까이도의 중심도시들이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미국은 소련군이 홋까이도에 상륙하기 전에 자기들이 먼저 홋까이도 중심도시들에 핵폭탄을 투하하여 전쟁을 끝내보려고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삿뽀로와 하꼬다떼에 투하할 핵폭탄 두 발은 약 3개월이 지난 1945년 11월에나 완성될 수 있었다.  

 

속이 타들어가던 미국은 긴급대책을 꺼내들었다. 1945년 8월 14일 미국군 B-29 폭격기 400대가 일본 각지 상공에 까마귀떼처럼 몰려들어 폭탄을 마구 쏟아부었고, 그날 밤에도 B-29 폭격기 300대가 까마귀떼처럼 몰려들어 일본 각지에 또 다시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 미국의 대공습으로 일본의 도시들이 거대한 화염 속에서 불타고 있는 아비규환 속에서 일왕 히로히또는 일본군 고위지휘관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진행했다. 그 자리에서 히로히또는 자신이 라디오방송을 통해 발표할 조서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전시내각은 즉각 히로히또의 최종결심에 찬동했다. 패전을 직감한 그들은 자기들의 전쟁범죄와 관련된 방대한 분량의 문서자료를 파기하기로 결정했다. 

 

1945년 8월 14일 오후 7시, 히로히또가 다음날 라디오방송을 통해 발표할 조서 문안이 완성되었다. 오후 11시 히로히또는 일본 <NHK> 방송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조서를 낭독하는 자기 육성을 레코드판에 녹음했다. 그러는 사이에 일본제국 외무성은 스위스와 스웨리예를 통해 미국에게 포츠담선언의 항복조건을 수락하겠다는 긴급전문을 발송했다.   

 

 

4. 딘 러스크가 날조한 거짓말

 

1945년 7월부터 8월까지 세계적인 대격변기에 미국은 식민지조선을 일본제국의 식민통치에서 해방시키려는 게 아니라, 조선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하는 흉계를 꾸몄다. 미국은 그런 흉계를 언제, 어떻게 꾸몄을까? 

 

조선반도분할방안을 작성하는 임무를 수행했던 딘 러스크(D. Dean Rusk)는 1990년에 출판된 ‘내가 본대로(As I Saw It)'라는 제목의 구술회고록에서 자기들이 조선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한 정황을 극적인 장면으로 서술했다. 그가 구술한 극적인 장면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일본제국이 항복한 1945년 8월 14일(도꾜 시간으로 8월 15일은 워싱턴 시간으로 8월 14일) 백악관에서 국무성-전쟁성-해군성조절위원회(SWNCC =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전략회의가 진행되었다. 일왕 히로히또의 조서가 라디오방송을 통해 전해진 8월 15일 정오는 워싱턴 시간으로 8월 14일 밤 11시였다. 백악관은 히로히또의 조서발표소식을 듣고 급히 전략회의를 소집했으므로, 전략회의가 시작된 시각은 워싱턴 시간으로 8월 15일 0시를 넘긴 깊은 밤이었다.  

 

2) 국무성-전쟁성-해군성조절위원회는 전쟁성 작전국 정책과에서 근무하던 현역 육군 대령들인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Jr.)에게 미국군이 조선반도에 상륙하여 어느 지역을 점령할 것인지를 정하는 중대한 과업을 맡겼다. 

 

3) 과업을 받은 러스크와 본스틸은 옆방으로 가서 조선반도를 어떻게 분할, 점령할 것인지를 논의했는데, 그들은 조선문제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문외한들이었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중압감을 느낀 러스크와 본스틸은 다급한 김에 미국국립지리학회가 발행하는 지리전문지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에 실린 조선지도를 펴놓고 살펴보다가, 서울 바로 북쪽에 그어진 북위 38도선에 눈길을 모았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린 지도는 너무 작아서 북위 38도선이 표시되지 않았는데, 딘 러스크는 그런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되어, 그들은 미국군이 38도선 이남지역을 점령하는 분할방안을 전략회의에 제출했다. 

 

4) 38도선 분할방안을 보고받은 국무성/전쟁성/해군성조절위원회는 별로 논란을 벌이지 않고 그 분할방안을 채택했다.

 

5) 미국은 소련이 38도선보다 더 남쪽에 분할선을 획정하자고 주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소련은 38도선 분할방안을 즉각 수락했다. (당시 소련의 관심은 조선반도가 아니라 일본 홋까이도에 쏠려있었다.)  

 

딘 러스크가 구술회고록에서 38도선 획정사건을 묘사한 장면은 너무 충격적이다. 장장 75년 동안 우리 민족을 헤아릴 수 없는 불행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38도선 분할이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 두 사람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결정되었다니, 충격적이다 못해 격분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사진 4>

 


딘 러스크가 구술회고록에서 위와 같이 극적인 장면을 서술해놓는 바람에, 사람들은 1945년 8월 15일 히로히또의 조서낭독방송 소식을 들은 미국의 전쟁지휘부가 백악관에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린 지도를 펴놓고 30분 만에 38도선 분할을 확정한 줄로 믿었다. 
 

 

하지만 딘 러스크가 구술회고록에서 서술한, 38도선 분할방안확정에 관한 서술내용은 커다란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백악관이 전후세계질서를 재편하는 중대한 문제를 논의하지 않고 허송세월하다가, 일왕의 조서낭독방송을 듣고 나서 허겁지겁 심야전략회의를 소집하여 그 문제를 결정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1945년 7월 26일에 발표된 포츠담선언 제8항에는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까이도, 규슈, 시고꾸와 우리가 정하는 그 밖의 작은 섬들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었다. 이것은 포츠담회의에서 전후세계질서를 재편하는 문제가 구체적으로, 심도 있게 논의되었음을 말해준다. 전후세계질서를 재편하는 문제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점령문제와 영토귀속문제였다. 다시 말해서, 일본제국이 식민지로 강점한 조선반도, 남사할린, 중국의 대만과 랴오닝반도 남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진행된 포츠담회의에서 조선반도, 남사할린, 중국의 대만과 랴오닝반도 남부를 처리하는 문제를 논의하지 않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포츠담회의에 수행단 일원으로 참석한 딘 러스크는 회의기간 중에 진행된 38도선 분할방안결정과정에 실무자로 관여한 것이 분명하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38도선 분할방안이 1945년 8월 15일 백악관 심야회의에서 황급히 결정되었다는 딘 러스크의 회고담은 날조된 거짓말인 것을 알 수 있다. 

 

 

5. 민족분렬의 재앙은 미국이 저지른 만행 

 

38도선 획정사건에 관한 딘 러스크의 회고담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완범 교수가 집필했고, 2013년 서울에서 출판된, ‘한반도 분할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에서 확인된다. 그 책에서 이완범 교수는 1949년 6월 17일 미국군 해리스 대령이 당시 미국 전쟁성 작전국장이었던 존 헐(John E. Hull)과 진행한 전화통화대담기록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하였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혔다. 

 

포츠담회의에서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James F. Byrnes)는 미국 군대가 조선반도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소련과 함께 조선반도를 분할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우리 전략가들은 3개의 주요항구(원산, 인천, 부산)를 주목했고, 이 중 2개의 항구(인천과 부산)을 우리 쪽에 포함시키고, 서울 바로 북쪽에 (분할)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어) 38선을 따라 (분할)선을 긋는 것이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  

 

1945년 7월 포츠담회의에서 일본점령계획을 수립하는 작업에 참여한 에드워드 로우니(Edward L. Rowny)는 노환으로 사망하기 3년 전인 2014년 서울에서 ‘운명의 1도’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출판했는데, 그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혔다. 로우니의 회고록에 따르면, 식민지조선을 분할점령하는 전략회의에서 딘 러스크와 앤드루 굿패스터(Andrew J. Goodpaster)는 남북을 39도선으로 분할하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39도선은 평양과 원산을 잇는 선이다. 그런데 그들의 직속상관 조오지 링컨(George A. Lincoln)은 남북을 38도선으로 분할하자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조오지 링컨은 당시 미국 예일대학교 국제정치학 교수였던 니컬러스 스피크만(Nicholas J. Spykman)이 제시한 이론에 근거하여 38도선으로 분할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스피크만은 1944년에 펴낸 ‘평화의 지리학(The Geography of the Peace)’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지구 북반부가 38도선을 경계로 문화적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미국의 국익이 지정학적으로 결정된다는 이론을 제시했는데, 그런 이론에 귀가 솔깃해진 조오지 링컨은 스피크만의 이론을 근거를 내세우면서, 남북을 38도선으로 분할하자는 참모들의 주장을 꺾고 자신의 38도선 분할방안을 밀어부쳤다는 것이다. <사진 5> 

 


위에 인용한 회고담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미국은 포츠담회의에서 전후 세계질서를 자기들의 제국주의적 이익에 맞게 재편하기 위한 방편으로 38도선 분할점령안을 확정했다. 1945년 8월 15일 직후 해방의 기쁨으로 들끓는 삼천리강토 위에 하루빨리 민주주의통일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우리 민족의 열망과 투쟁이 고조되고 있었을 때, 미국은 우리 강토를 38도선으로 갈라놓고 그 남부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역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미국의 38도선 분할점령은 우리 민족에게 재앙의 근원이었다. 1,000년 동안 한 나라 강토에서 함께 살아온 우리 민족이 미국의 38도선 분할점령 때문에 남북으로 갈라지는 재앙에 빠졌고, 그로부터 5년 뒤에는 6.25전쟁이 일어났다. 미국의 38도선 분할점령으로 시작된 민족분렬의 재앙이 75년 동안 지속되는 바람에 우리 민족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겪어야 했다. 지금도 미국은 평화협정체결을 거부하고 침략무력증강과 북침전쟁연습을 끊임없이 감행하면서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건설운동을 악랄하게 반대하고 있다. 우리 강토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미국은 천추에 용납 못할 분단원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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