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참가자들은 <강희남박창균이희영정신 계승하여 내란무리 청산하자!>, <강희남박창균이희영정신 계승하여 미제침략세력 끝장내자!>, <강희남박창균이희영정신 계승하여 민중민주새세상 앞당기자!>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송무호반파쇼민중행동상임대표, 문대골한국기독교장로회원로목사가 대표헌화했다. 이어서 민중민주당학생당원들이 강희남·박창균·이희영선생의 약력소개를 진행했다.
권오창우리사회연구소이사장은 <강희남박창균이희영 정신따라 조국을 통일하자!>, <미제를 이땅에서 몰아내고 우리민족끼리 조국을 통일하자!> 구호로 추모사를 시작했다.
권오창선생은 <기나긴 반민중독재치하에서 학생투쟁을 중심으로 범민련투쟁이 시작됐다. 선생들은 기나긴 투쟁속에서 조국통일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길을 개척해놨다.>며 <투쟁과정에서 개량주의노선을 고수한 이들로 인해 범민족대회를 2군데에서 여는 등의 일이 있었고, 범민련노선을 고수하기 위해 탄압속에서 갖은 노력을 다해왔었다>고 회고했다.
또 <윤석열이 미일<한>상호방위조약의 토대위에서 민중을 탄압하고 비상계엄을 시도하다가 민중에 의해 저지당하고 21대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내란세력들은 물러가고 민중주체의 시대를 열어갈 통일정부가 들어섰다.>면서 <선생들이 뿌려놓은 통일의 씨앗의 결실을 오늘 우리들이 거두게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적미군철수투쟁본부상임대표는 <선생들의 역사가 올바르게 잡힐 때 비로소 올바른 국가가 서는 것이고 민중이 살아있음을 보여줄수 있을 것이다>라며 <옳은 길을 걸었던 선생들이 있기에 오늘 <현충일>에도 우리는 자주정신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자주의 길을 따라 걸어나갈 것이다>라고 힘줘 말했다.
이어 <이땅을 이끌어 나가는 영령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가슴속에 문신으로 새기고 있다. 그 문신이 살아 우리는 올바른 나라에서 민중으로 살아갈 것이다. 함께 싸워나가자.>고 강조했다.
이미숙민중민주당광주시당위원장이 추모모임의 추모사 <통일애국열사정신 따라 반파쇼반제항쟁에 총궐기하자!>를 낭독했다.
추모사는 <조국의 안팎에 조성된 준엄한 현실은 지금이야말로 세분선생의 신념과 의지를 따라 투쟁해야 할 때임을 보여준다>며 <강희남의장과 박창균대표·이희영선생의 정신은 민족자주·애국애족사상>이라고 밝혔다.
계속해서 <자주와 민주, 통일과 평화를 위한 변혁의 길에서 안팎으로 조성된 모든 고난과 역경을 한치의 굴함없이 과감하게 돌파하며 활로를 개척한 통일애국열사분들의 삶과 투쟁은 혁명가의 귀감으로서, 우리의 심장을 높뛰게 한다>, <통일애국열사분들의 자주의 신념과 변혁투지를 이어받은 우리는 반파쇼반제항쟁에 온민중을 불러일으켜 양키와 파쇼무리를 끝장내고 자주통일과 민중민주를 앞당길 것>이라고 확신했다.
끝으로 전체 헌화가 진행됐다.
다음은 약력과 추모사전문이다.
흰돌 강희남의장 약력
1920년 1월 13일 전북 김제 농가 강학용과 류성녀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1935년 초등학교 졸업 후 한문수학 및 독학의 길로 접어들다
1935년 정복님과 결혼 후 예수교에 입교하고 슬하에 3남 4녀를 두다
1947년 한국신학대 입학하다
1950년 익산에서 중학 교사로 부임
1952년 군산 영명 중학 교사로 전임
1955년 군산교회에서 목사로 안수받다
1959년 몇 교회들을 거쳐 전주 영생중고등학교 교감으로 부임
1963년 전주 성광교회를 비롯하여 난산교회 등 목회에 전념
1977년 난산교회 시무 중 박정희정권에 도전하다가 전주교도소에 투옥, 1980년 초에 출옥
1977년 9월 광주고법 첫 공판일에 윤보선 내외 등 1천여명의 방청객들이 방청하려했으나 재판을 연기, 이에 경찰 및 공안기관에 맞서 민중 난투극이 벌어져 부상자 속출
1979년 광주교도소 수감 당시 장남이 광주교도소로 이감을 와 대전으로 송치됨
1980년 초 대전에서 출옥
1983년 문익환 목사와 민통련을 창립하고 대의원총회 의장에 취임. 이 해에 아내와 사별
1983년 기독교농민회 이사장을 겸하여 4개년을 지내다
1987년 전북대 강연으로 2차 투옥되어 전두환의 호헌조치 반대 옥중단식투쟁에 들어가 40여일을 지내다. 그해 6월 민중항쟁으로 출옥하다
1988년 조성만 열사 장례위원장을 맡다
1990년 저서 『역사속의 실존』 을 출간
1991년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다. ‘령성과 해방’을 번역 출간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조문시도 사건으로 3차 투옥
1995년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취임(초대의장). 범민련 관계인사 29명과 함께 투옥 됨(4차 투옥)
1996년 저서 『민중주의』 출간
1999년 10차범민족통일대축전 추진본부 의장을 맡아 박창균통일선봉대장 등과 함께 성황리에 개최한 후 수배, 명동성당에서 4개월 동안 농성 투쟁 전개
2000년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사임
2003년 <이라크파병저지 목포-서울 도보 민중행진단> 20일간 천리 도보행진
2003년 저서 『중국 동북3성을 가다 : 고대사소고』 출간
2004년 4월 우리민족련방제통일추진회의(련방통추) 결성
2004년 독일 동포들 초청강연으로 유럽행을 떠나다
2005년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이라크 파병 저지운동으로 목포에서 서울까지 도보행진 시위를 강행
2005년 5월 미군추방투쟁공대위 결성
2005년 5월10일~7월17일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철폐를 위해 동상 앞에서 69일 동안 투쟁
2006년 용산 양키기지 앞과 양키대사관 앞 양키추방 투쟁 54회 진행
2008년 저서 『정리된 상고사』출간
21세기코리아연구소 주최의 제1회 파리국제포럼 참석
2009년 범민련남측본부 명예의장
2009년 6월 6일 ‘리명박을 내치자’라는 남기는 말(유서)을 남기고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 향년 89세
박창균선생 약력
1925 함경북도 무산 출생
1951 한국신학대학(한신대) 졸업
1951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 고시 합격
1952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 장립
1960~1970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 아현동 행화정교회 시무
1965 한국신학대학 총동창회 회장 역임
1970년대초 통일사회당 입당
1972 세계사회당지도자 동경대회 한국대표로 참석
1974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
1989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민자통) 공동의장 역임
1989 국가보안법(민자통 조직사건)으로 3년 징역, 3년 집행유예 선고
1990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결성 구성원으로 참여
1995 국가보안법(범민련 남측본부 사건)으로 3년 징역, 3년 집행유예 선고
1998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 감사 역임
1999 범민족통일대축전 통일선봉대 총대장 역임
1999 국가보안법(범민련 남측본부 사건)으로 3년 징역, 3년 집행유예 선고
2003 우리민족련방제통일추진회의(련방통추)결성 주도 및 상임고문 역임
2007~2010 민주노동당 노년위원회 위원장 역임
2010~2012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범민련 결성 20돌 기념사업회 국민위원회 고문, 련방통추 고문, 한국진보연대 고문 역임
2011~2012 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코리아연대(코리아연대) 상임대표 역임
2012. 3. 12 영면
이희영선생 약력
1947년 8월14일서울서대문구홍제동출생
1954년 서울 안산국민(초등)학교 입학
1960년 서울 동명중학교 입학
1963년 서울 서울여고 입학
1966년 한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입학
1970년대 故박창균목사와 함께 통일사회당 활동
1980년대 故박창균목사와 함께 민주화운동에 참여
1986년 故박창균목사와 혼인
1990년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를 중심으로 통일운동에 참여
2008년 4월 민주노동당 연천군준비위원회 가입 활동
2011년 12월 통합진보당 연천군준비위원회 가입 활동
2012년 3월 민가협양심수후원회 가입 활동
2012년 4월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가입 활동
2012년 7월 6.15산악회 가입 활동
2013년 4월 21세기경기여성회 대표 역임
2013년 5월 코리아경기연대 대표 역임
2013년 5월 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코리아연대(코리아연대) 공동대표 역임
2013년 10월 사월혁명회 가입 활동
2014년 6월17일 영면(향년 67세)
[추모사]
통일애국열사정신 따라 반파쇼반제항쟁에 총궐기하자!
위대한 우리민중의 승리앞에서 강희남의장, 박창균대표, 이희영선생을 절절한 그리움을 담아 떠올린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다는 말이 이토록 사무쳤던 나날이 있었는가. <고난당하는 민중을 생각할 때 역사의 방관자로 살 수 없다>고 한 강희남의장은 생의 마지막 순간 <민중주체의 시대>를 선언하며 <제2 6월민중항쟁으로 살인마 리명박을 내치자>는 사자후와 같은 유지를 남기며 고결한 한생을 마감했다. 12월항쟁을 통해 우리는 선대열사들이 우리심장속에 새겨놓은 순결한 민중사랑정신과 강렬한 파쇼타도의지를 절감하게 된다.
민중애이자 민족애며 후대사랑정신이다. 강희남의장은 1990년대 친미반역세력의 악랄한 탄압과 기회주의세력의 분열적 망동을 딛고 조국통일의 최선봉에서 가열하게 투쟁했으며, 고령의 나이에 <맥아더동상철폐>와 <양키추방>을 촉구하며 반미자주투쟁을 전개했다. 그 옆에는 항상 가장 가까운 혁명동지인 박창균대표가 함께 분투했다. 1999년 10차범민족통일대축전 통일선봉대장을 역임하며 우리민중의 통일의지를 과시했던 박창균대표는 암투병중이던 생의 마지막시기 코리아연대상임대표로서 2011년 12월26일 김정일국방위원장서거추모를 위해 조선에 방문한 황혜로코리아연대공동대표소식을 전하며 <방북조문 허용하라!>를 준열하게 외쳤다. 코리아연대공동대표를 역임한 이희영선생은 불치의 병환중에 당신을 돌보지 않은채 민족과 민중, 후대의 미래를 위해 생의 마지막불꽃을 남김없이 태웠다. 위대한 인간의 위대한 정신은 지금도 우리들 가슴속에 붉게 타오르고 있다.
우리민중·민족의 존엄과 생명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파쇼반동들은 12.3비상계엄으로 시작된 내란을 내전으로 전변시키기 위해 최근까지 충돌과 폭동, 테러와 공작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새정권이 들어서면서 죽을길밖에 남지 않은 야수무리들이 내전을 유일한 살길로 여기며 최후발악을 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특히 파쇼반동의 배후에 양키, 제국주의호전세력이 있다는 것에 예의주시해야 한다. 제국주의호전세력은 동아시아전으로 3차세계대전을 본격화하기 위해 작년 9월부터 11월 대조선국지전을 맹렬하게 도발했고 12월 친미친위쿠데타를 기획, 조종했다. 3차세계대전·동아시아전에 필사적인 제국주의호전세력에게 <한국>전은 필수적 전제라는 것에 고도의 경각성을 가져야 한다. 조국의 안팎에 조성된 준엄한 현실은 지금이야말로 세분선생의 신념과 의지를 따라 투쟁해야 할 때임을 보여준다.
통일애국열사분들의 드팀없는 자주의식과 불요불굴의 투쟁정신을 실천적으로 계승하여 끊임없이 전진해야 한다. 강희남의장과 박창균대표·이희영선생의 정신은 민족자주·애국애족사상이다. 통일애국열사분들은 민족단합과 민중주체를 실현하기 위해 일로매진하며 헌신분투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민족과 민중을 뜨겁게 사랑했고, 양키와 파쇼를 격렬히 증오했다. 자주와 민주, 통일과 평화를 위한 변혁의 길에서 안팎으로 조성된 모든 고난과 역경을 한치의 굴함없이 과감하게 돌파하며 활로를 개척한 통일애국열사분들의 삶과 투쟁은 혁명가의 귀감으로서, 우리의 심장을 높뛰게 한다. 통일애국열사분들의 자주의 신념과 변혁투지를 이어받은 우리는 반파쇼반제항쟁에 온민중을 불러일으켜 양키와 파쇼무리를 끝장내고 자주통일과 민중민주를 앞당길 것이다. 통일애국열사분들의 꿈과 이상은 머지않아 실현될 것이다.
흰돌강희남기념사업회·통일애국열사강희남범민련의장추모모임·박창균이희영선생추모모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