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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코레아뉴스 | 6.25전쟁 당시 미국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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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7-29 20:1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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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그림 조선에서의 학살의 배경신천 학살


6.25전쟁 당시 미국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미군, 범죄, 유해, 전쟁, 트럼프, 학살    이형규 기자  !  주권연구소  연구소


2018727일은 정전협정 체결일로, 6.25 전쟁의 참화를 끝낸 지 65년이 되는 날이다.

 

올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올해 612일 싱가폴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북미 정상은 공동성명 4조에서 전쟁포로 및 행방불명자들의 유해발굴을 진행하며 이미 발굴 확인된 유해들을 즉시 송환할 것을 합의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6.25 전쟁으로 인한 미군 전사자의 유해 송환 문제에만 관심을 갖기 전에 한반도 국민에게 사죄해야할 일이 있다. 바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범죄이다.

 

6.25 전쟁 당시 미군이 한반도 이남 지역에서 한 민간인 학살 중에 잘 알려진 것은 노근리 학살이다. 미군은 피난민을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의 철로와 굴다리에서 폭격하고 기관총으로 쏘아 학살한 사건이다.

 

미국이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 입장을 표명한 것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노근리 학살에 대해 사과가 아닌 유감표명을 한 것이 전부이다. 미국은 한반도 이북 지역에서도 천인공노할 민간인 학살을 수없이 저질렀다.

 

파블로 피카소는 6.25 전쟁 당시 신천 학살에 대한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그림 조선에서의 학살(MASACRE EN COREA)’을 그렸다고 한다.

 

북한 당국에 따르면 6.25 전쟁 시기 미군에 의해 학살당한 북한 민간인은 172천 명이라고 한다. 그 중 황해도 신천군의 경우 인구의 1/435,383 명이 학살되었고 그 가운데 어린이, 노인, 여성이 무려 16,234 명이나 된다고 밝혔다.

 

북한은 미군이 민간인을 집단 생매장, 건물을 감금 및 밀폐하여 질식사시키거나 굶겨 죽이기 태워죽이기 등의 방법으로 학살했다고 한다. 강정구 교수에 따르면 북한은 조선통사()’에서 미군에 의한 학살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한다.

 

눈알을 빼며 귀와 코를 도려내며 산채로 톱이나 칼로 사지를 자르며 피부를 벗기며 불에 달군 쇠로 지지며 산 사람을 탱크로 깔아죽이며 임신부의 배를 갈라 죽이는 등 형언할 수 없는 야수적 학살 방법을 거리낌 없이 감행했다.”

 

국제민주여성동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는 1951년 진상조사단을 북한에 파견하였다. 강정구 교수는 조사단이 19523월 작성한 조선에서의 미국범죄에 관한 보고서에서 미군의 신천 학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밝혔다며 인용하였다.

 

미국군대가 신천군 초리면 월산리에 들어온 바로 그 날에 우말재의 가족에 대해 끔직한 범죄가 감행되었다. 미국인들은 증인의 남편의 손과 귀와 코를 쇠줄로 꿰어 뚫었다. 그들은 방에 있던 노동표창장을 그의 이마에 못으로 박아 붙이고 그가 죽을 때까지 고문했다. 5세로부터 25세에 이르는 11명의 우말재 가족의 자녀들은 즉석에서 총살되었다. 우말재의 며느리는 미국장병들이 그 시아버지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제지하려고 하였다. 미국인들은 이 여성의 머리채를 잡아서 나무에 비끌어 맨 다음 가슴을 베고 국부에다 막대기를 박고 기름을 부은 다음 불을 질렀다. … 이 범죄에는 약 20명의 미국장병이 참여하였다.

 

이어 강정구 교수는 조사단에 참가한 영국인 모니카 펠톤(MONICA FELTON)의 기행문인 ‘THAT’S WHY I WENT’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안악군 송화리 117번지에 살다 신천의 창고수용소에 갇혀서 간신히 죽음을 면한 28살의 양연득 여인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어린이 다섯과 남편을 가진 7식구였으나 미군이 강점하자 남편은 즉시 살해되고 그녀와 다섯 어린이는 어떤 창고에 수용되었다. 이 창고는 약 300여명의 여자와 어린이를 수용했다고 한다. 이 좁은 수용소에서 밀고 밀리는 아수라장 속에서 그녀의 두 살 난 어린이는 밟혀 죽었다. 며칠 뒤 미군 두 명이 그녀를 밖으로 끌고 나와서 차례로 성폭행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 겨우 도망쳐 나와 신천이 다시 해방될 때까지 숨어 지냈다. 해방된 뒤에야 비로소 그녀의 네 어린이들이 그곳 창고수용소에서 불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신천 외에서도 숱하게 발견된 미군의 민간인 학살

 

국제민주법률협회 조사단은 미군이 신천군 지역 외에서 한 학살에 대해서도 밝혀놓았다.

 

해주시에서 미국병정들은 지방여맹위원장인 조옥희라는 젊은 여성을 고문하였던 바 이 여성은 증인과 같은 감방에 구금되어 있었다. 조사단원들이 심문한 증인의 진술에 의하면 미국군대는 그 여성에게 장시간에 걸친 고문을 하였다. 처음에는 그 여성의 눈을 뽑고 얼마 뒤에 그의 코를 베었고 마지막에는 그의 가슴을 베었다

 

19501025일 사리원시에서 MP완장을 찬 한 미국군인은 김창두라는 사람에게 끔찍한 살인을 감행하였다. 그는 칼을 가지고 목에서부터 아랫배까지 희생자의 피부를 째고 산채로 피부를 벗기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하다가 잘 안되니까 그는 희생자를 돌로 때려 죽였다. 19501111일 한 젊은 여성은 3명의 미국인들에게 강간당하였다. 이 여성은 몹시 구타당하였으며 또한 발로 채였으며 그의 목구멍에는 물을 부어 넣었다. 다른 병정들은 56세 된 노파를 강간하였다

 

강정구 교수는 모니카 펠톤의 기행문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조사단이 황해도에서 처음 확인한 곳은 19,000여명이 살해되었다는 안악이었다. 처음 방문한 곳은 어른과 어린이들이 함께 가두어 며칠 동안 물과 음식도 일체 공급하지 않고 심지어는 누울 수조차 없도록 사람을 많이 가두었던 간이 수용소였다. 그곳은 농가의 창고였었고 통풍할 창문도 없이 밀폐된 곳으로 단지 지붕과 담 사이에 있는 길다란 좁은 구멍으로 공기가 통할뿐이었다. 여기에 수백 명이 억류되어 죽었고 몇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무차별 폭격으로 인한 양민 학살

 

전쟁초기 6개월 동안 미 극동공군폭격사령관을 역임했던 어메트 오도넬은 맥아더 청문회 증언에서 나는 전부, 한반도의 전부가 정말 놀랄 만큼 어지럽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름값을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서 있지 않습니다. 중공군이 들어오기 바로 전에 우리는 무기를 손에서 놓게 되었으니까. 한국에는 더 이상 목표물이 없습니다.”라고 밝혔다.

 

미국은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북한의 5개 주요도시인 평양, 성진, 나진, 원산, 진남포가 철저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원산의 경우 미군의 폭격이 정전 1분전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군대기합의 일종으로 사회적으로 알려진 원산폭격도 기합받는 자세가 6.25전쟁 당시 원산을 폭격하던 미군 비행기의 모양과 유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미 해군함정이 원산을 41일 동안 밤낮 없이 연속적으로 포격했으며, 현대미해군사상 최장일인 861일 동안 포위 공격했다고 한다. 미 해군소장 스미스는 원산에서는 길거리를 걸어다닐 수 없다. 24시간 내내 어느 곳에서도 잠을 잘 수 없다. 잠은 죽음을 의미했다라고 기술했다.

 

6.25전쟁 당시 뉴욕타임즈 특파원은 미군의 양민학살에 대해 1951221일자 기사에서 한국인들이, 공산당이 그들의 고향과 학교를 세워둔 채로 퇴각한 반면, 가공할 무기로 싸우는 유엔군이 일단 주둔했던 도시는 까맣게 하고(초토화하고) 떠나는 것을 보았을 때에 공산당은 심지어 퇴각 중에도 도덕적인 승리를 기록했다.”라고 보도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미국이 6.25전쟁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은 극악무도한 범죄였다.

 

*이 기사는 우리사회연구소의 <6.25 미군범죄 고발 – 1. 양민학살>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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