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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포뉴스 | 제주 4.3 양민학살 71년, 아직도 해결못한 살상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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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9-04-03 15:2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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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71주기를 하루 앞둔 2일 오후 4·3 당시 수형자였던 할머니들이 수감 이후 생존수형인 자격으로 처음 제주도를 방문해 제주도의회 의장실에서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정추(90), 김묘생(92), 변연옥(92), 송순희(95) 할머니. 권도현 기자


제주 4.3 양민학살 71년, 아직도 해결못한 살상의 진실 

1948년 4월 3일은 이승만 정권이 제주에서 자행한 양민학살이 시작된 날이다, 공산당을 소탕한다며 서북청년단 출신 군인 경찰을 동

원하여 무고한 제주시민을 3만명이상 무차별 학살이 자행된지 71년이 되는 해이다.

이승만 친미 반민족 정권과 박정희등 군사 독재정권등이 반북 반공으로 국민위에 군림하던 역대 폭력정부에 의해 4.3 제주반란으로 

둔갑되어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70년 세월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숨죽이며 살아왔다.

2000년 깁대중 정부에 의해 제주도민 학살 진상과 법이 국회에 상정되었지만 20년이 다 되도록 통과되지 않고있다.

한국전쟁 다음으로 군대와 경찰에 의해 무고한 양민이 희생된 이 야만의 실체가 밝혀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잎에 올수 없다. 

코레아뉴스 편집실   아래는 경향신문이 보도한 피해자와 후손들의 증언이다.


[제주 4·3 71]“고문 후유증 정신적 고통은 총알 박힌 상처보다 못하단 말인가요

박미라 기자 : 경향신문

인정받지 못한 희생자들


제주 4·3 당시 모진 고문을 당한 정순희 할머니(왼쪽 사진)와 왼쪽 다리 부상을 입은 양창옥 할아버지 . 이들은 뚜렷한 외상이 없다는 이유로 4·3 후유장애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박미라 기자

■ 어머니 총살 목격·모진 고문 기억에 잠 못 이루는 정순희 할머니와 5세 때 경찰이 패대기쳐 평생 왼쪽 다리 절뚝이는 양창옥 할아버지

서귀포시 정순희 할머니 행방불명 오빠 소재 대라며 

손발 묶고 물고문·전기고문 어머니 총살 장면도 지켜봐

13세 때 충격, 평생 악몽으로

 

곡간 문에 발을 묶어 거꾸로 세워놓고 고춧가루 푼 물을 코와 입으로 들이부으면 이제 죽는구나 싶었다. 전기고문에 온몸에 고름이 바글바글 흘렀고, 쥐와 고양이가 내 몸 위로 뛰어다녔다.”

 

제주 서귀포시 강정동에서 나고 자란 정순희 할머니(84)4·3의 광풍에 휩쓸린 건 13세 때이던 1948년이다. 서북청년단 출신 군인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어머니가 총살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소녀는 71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시간 이상 잠을 이루지 못한다.

 

정 할머니는 당시 17세이던 오빠가 행방불명되자 오빠에게 몰래 밥을 나르고 있는 것 아니냐’ ‘어디에 숨겼냐며 언니와 함께 끌려가 고문을 겪어야 했다고 말했다.

 

19481121일 군인들이 신작로에 쌓인 돌을 치워야 한다며 남자들을 불러모았다. 불행은 이동 중에 일어났다. 트럭을 타고 가다 한 아이가 킥킥거리며 웃자 군인들이 총 개머리판으로 아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참다 못한 정 할머니 오빠가 아이들이 웃을 수 있지 않냐고 했고, 군인들의 개머리판은 오빠에게 향했다.

 

정 할머니는 오빠는 맞고 있다가 트럭이 다리를 건널 때 냇가로 굴러떨어졌다고 했다. 오빠가 떨어진 쪽을 향해 군인들이 우르르 총을 쐈다고 하더라. 오빠는 이후 행방불명됐다나중에 갔지만 시신도 못 찾았다. 오빠가 4·3 때 어떤 회의라도 한번 참석한 후 이런 일을 당했으면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사연은 당시 트럭에서 웃었던 아이가 정 할머니 집에 찾아와 형님이 나 때문에 그렇게 되셨다고 말해줘 알게 됐다.

 

군인들은 이후 정 할머니 집을 포위하고 오빠를 찾는 데 혈안이 됐다. 군인들은 정 할머니 집에서 식량을 모조리 가져갔고, 집 나무가 좋다며 집까지 뜯었다. 정 할머니는 어느 날 언니와 내가 오빠에게 밥을 나르는 것을 봤다는 제보가 있었다며 우리를 끌고 갔다. 서로 말을 맞출까 언니는 법환지서에, 나는 강정초등학교 옆에 있는 곡간에 갇혔다고 말했다.

 

모진 고문이 이어졌다. “문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심심하면 한번씩 툭툭 치며 장난감으로 삼았다. 다리와 허리, 가슴, 팔을 묶고 냄새만 맡아도 매운 고춧가루 물을 코와 입으로 들이부었다. 기절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어떤 날은 바른말 하라며 쇠꼬챙이를 이 사이에 집어넣고 입을 벌리게 했다. 그때 앞니 2개가 빠졌다. 돈이 없어 결혼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이 없이 살았다. 쇠꼬챙이 같은 것으로 팔, 허벅지, 가슴 등 온몸을 찌르면 찌르르 찌르르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전기고문 같다. 온몸에 고름이 나고 아팠지만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했다. 법환지서로 끌려간 세 살 위 언니도 비슷한 고문을 받았다고 했다.”

 

정 할머니 자매는 오빠에게 밥을 갖다주는 것을 봤다는 주민의 제보가 거짓이었음이 드러나면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지금도 불면증에 시달린다. 할머니는 수면제, 우울증 약을 몇 알씩 먹어도 한 시간 이상 잠을 자지 못한다. 잠 못 자는 게 제일 큰 병이다. 두어 시간 이상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당시 13세 소녀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고문과 같은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었다. 정 할머니는 어머니가 참혹하게 총살당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7세 때 아버지를 여읜 정 할머니에게 어머니는 세상의 전부였다. 정 할머니는 같은 해 1216일 어머니, 언니와 함께 폭도 가족이라며 잡혀갔다. 군인들이 총 쏘기 바로 직전, 높은 직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군인이 와서 보다가 애들은 죄가 없으니 살려주라라고 말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했다. 할머니는 당시 군인들은 폭도의 가족들이다. 눈 뜨고 크게 보라고 말하며 어머니와 모아놓은 마을 사람들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정 할머니는 어머니가 억울하게 돌아가신 이후에도 마을에서 폭도 가족이라며 멸시를 당했다고 했다.

 

한겨울 추위 속에서 고문받으며 갇혀 지낸 곡간에서의 기억도 정 할머니를 현재까지 괴롭힌다. 정 할머니는 곡식을 보관하는 곡간이다 보니 쥐가 가득이고, 쥐를 잡으려는 고양이도 여럿 뛰어다녔다. 지금도 곡간에서 내 몸 위로 파닥파닥 뛰어다니던 고양이와 쥐가 생각난다며 몸서리쳤다.

 

정 할머니는 여전히 고문 후유증으로 온몸이 아프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지만 4·3 후유장애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몸 여기저기가 아파 죽겠고 진통제에 의지해 살지만 의사 말로는 손이나 다리가 절단되든지, 총알이 박히는 식이 돼야 진단서를 끊어준다고 했다. 진단서가 없어 지난해 희생자 신고 기간에도 후유장애 신청을 하지 못했다.”

 

4·3은 정 할머니를 평생 괴롭혔지만 피해는 인정받지 못했다.

 

“4·3 추념식 때마다 정부 관계자가 와서 억울함 다 풀어준다고 하는데 말뿐이다. 내가 앞으로 살아봤자 얼마나 살겠나. 가족들에게도 말 못하고 묻었던 과거지만 이제라도 말하는 것은 억울함이라도 풀고 싶었기 때문이다. 4·3이 뭔지 아느냐. 멀쩡한 사람을,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죄인으로 만든 일이다.”

 

제주 4·3 당시 모진 고문을 당한 정순희 할머니(왼쪽 사진)와 왼쪽 다리 부상을 입은 양창옥 할아버지 . 이들은 뚜렷한 외상이 없다는 이유로 4·3 후유장애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박미라 기자

제주 4·3 당시 모진 고문을 당한 정순희 할머니(왼쪽 사진)와 왼쪽 다리 부상을 입은 양창옥 할아버지 . 이들은 뚜렷한 외상이 없다는 이유로 4·3 후유장애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박미라 기자



 

제주시 양창옥 할아버지

중산간마을 초토화 작전 때

엄마 등에 업힌 다섯살배기

경찰이 다리채 잡아 패대기

무릎장애 고생, 인정 안 해줘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에 사는 양창옥씨(75)는 평생 왼쪽 다리를 절뚝이고, 다리가 빠지는 고통을 겪으며 지냈다. 194812월 중산간 마을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지고 초토화 작전으로 참혹한 집단살상이 이뤄지던 때였다. 당시 다섯살이던 양씨와 어머니는 동네 인근 자연동굴에 숨어 있다 붙잡혀 한림지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양씨는 어머니 등에 업혀 있었는데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로 경찰이 다리를 잡아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때 왼쪽 다리가 빠졌는지 이후 절뚝이며 생활했고,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보니 오른쪽과 달리 왼쪽 무릎에는 연골이 없다고 했다. 왼쪽 귀도 이후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4·3으로 인한 장애라는 진단을 내주지 않았다. 겉으로 봤을 때 특별한 상처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 연골이 닳은 이유, 절뚝이는 원인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나이가 있고 소를 키우는 힘든 노동을 하며 지낸 노인에게 이러한 질병은 흔히 올 수 있다고도 했다. 양씨는 지난해에도 후유장애 희생자로 신고하기 위해 여러 병원을 다녔으나 진단서가 나오지 않아 추가 희생자 신청조차 못했다. 4·3 당시 피해를 직접 목격한 보증인 3명도 이미 다 사망했다.

 

부인 변영자씨는 “29세에 시집왔을 때부터 남편은 어린 시절 4·3 때 입은 상처 때문이라며 다리를 잘 쓰지 못했다. 왼쪽 다리는 덜 쓴 탓에 오른쪽 다리보다 얇다. 왼쪽 무릎 아래 다리가 곧잘 빠진다. 일하다가도, 걷다가도 종종 왼쪽 다리가 빠져서 나 죽네아파하며 쩔쩔매곤 한다. 처음에는 나도 당황했는데 이제는 능숙하게 다리 끼우는 법도 터득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생전 시어머니도 온몸의 고통을 호소하셨다. 동굴에서 발각되자마자 개머리판으로 맞고 다섯살 된 어린 아들을 업은 채 맨발로 10㎞ 넘는 돌투성이 길을 걸어가셨다고 했다. 돌아가시기 전 유독 발바닥이 아프고 시리다고 하셨다. 억울함도 못 푸시고 1985년에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양씨는 4·3 당시 아버지와 두 형을 잃은 4·3 유족이기도 하다. 큰형이 산에 올랐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194810월 총살당했다. 큰형도 산에서 토벌대에 의해 죽었다. 둘째 형은 주정공장에 잡혀 있다가 대전형무소로 옮겨져 행방불명됐다. 양씨는 주정공장에 어머니랑 나, 셋째 형도 잡혀 있었는데 큰아버지의 보증으로 겨우 풀려났다둘째 형은 이후 소식을 모르다가 옷 한 벌만 보내달라는 편지가 와서 대전형무소에 있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둘째 형은 이후 또다시 소식이 끊겼다. 총살당해 암매장된 것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대전형무소에는 1949년 제주에서 이뤄진 불법 군법회의 대상자 300명이 수감돼 있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살아 돌아온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지난 216일부터 414일까지 제주평화기념관에서 진행 중인 제주4·3 생존 희생자 그림기록전에는 양씨의 자화상이 전시돼 있다. 생존 희생자들이 당시의 기억을 그림으로 그리며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채록한 것이다.

 

 

양씨는 정면을 바라보며 곧게 서 있는 자신의 전신을 그렸다. 왼쪽 다리는 오른쪽 다리에 비해 채색도 연하고 굵기도 가늘다. 양씨는 지난해부터 건강이 나빠져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기자가 찾은 그날도 양씨는 누인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양씨는 어디 가서 4·3에 대해 입도 벙긋 못할 때는 마음 병에 술만 먹었다이제 좀 말할 수 있게 됐는데, 다친 것은 나라에서 인정 못하겠다고 하니 억울하고 억울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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