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3] 김일성 주석의 애민사상 > 코레아뉴스

본문 바로가기
코레아뉴스

남코레아뉴스 | [기획연재3] 김일성 주석의 애민사상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2-04-09 16:41 댓글0건

본문


[기획연재3] 김일성 주석의 ‘애민’ 사상

김영란 기자 | 기사입력 2022/04/07 [22:12]

북한은 올해 1월 조선노동당 제8기 제6차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김일성 주석 탄생 110돌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탄생 80돌을 “승리와 영광의 대축전”으로 “성대히 경축”하겠다고 하였다. 통일의 상대방인 북한이 국가 차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계기에 대해 우리도 학술적으로 자세히 연구하는 게 통일을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자주시보와 주권연구소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기획연재를 10회에 걸쳐 준비하였다. 

 

 

3. 김일성 주석의 ‘애민’ 사상

 

1.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나라’ 

 

북한은 헌법 서문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주체적인 혁명노선을 내놓으시고 여러 단계의 사회혁명과 건설 사업을 현명하게 영도하시어 공화국을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나라로, 자주, 자립, 자위의 사회주의국가로 강화 발전시키시었다”라고 밝혔다.

 

북한이 말하는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 나라’에 대해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라의 주인은 ‘인민’이기 때문에 인민대중 자신이 주인이 되어 ‘인민’의 정치를 실시하며 모든 것이 ‘인민’ 자신을 위해 복무하게 한다는 뜻이다.” (김이경, 『좌충우돌 아줌마의 북맹탈출 이야기』, 내일을 여는책, 2019.)

 

북한을 방문한 다른 사람들 역시 북한이 ‘국민 중심의 나라’이며, 여기에 김일성 주석의 지도가 있었다고 증언한다. 

 

독일의 유명한 소설가인 루이제 린저는 1980년, 1981년, 1982년 세 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과도 몇 차례 대화를 나눴다.

 

린저는 ‘인민과 더불어’라는 소제목이 붙은 방북기에서 “내가 체험한 바로는 김일성 주석은 실제로 탁자 앞에만 앉아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들에게로 가서 그들의 입장이 되어 자극을 주고 조언을 받아들인다. 평양에서 치밀하게 짜여져 나오는 계획들은 김일성 주석이 현장에서 농업전문가들 및 노동자들과 협의한 결과물”이라고 썼다. (루이제 린저, 『또 하나의 조국 - 루이제 린저의 북한방문기』, 공동체, 1988.)

 

항일운동 당시 김일성 주석과 깊은 인연이 있었던 손정도 목사의 아들이자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의료인과 종교인의 삶을 살았던 손원태 선생도 회고록에 방북 당시의 감상을 담았다. 

 

“북조선에는 ‘인민’이라는 낱말이 도처에 있다. 정부 기관은 인민위원회, 군대는 인민군대, 소학교는 인민학교, 병원도 인민병원 그리고 인민배우, 인민기자, 인민교원 등등 가장 높은 명예 칭호에도 인민이라는 말이 붙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의 구호나 선전 문구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그대로 정치의 중심사상으로, 방식으로 되고 있으며 실천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손원태, 『내가 만난 김성주-김일성』, 동연, 2020.)

 

김일성 주석과 ‘인민’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자. 

 

2. 김일성 주석과 ‘이민위천’

 

‘애민’정치의 시작 ‘이민위천’

 

김일성 주석의 좌우명은 ‘이민위천’이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민위천’, 인민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이것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었다.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그 힘에 의거할 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 신앙이며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한생을 인민을 위하여 바치게 한 생활의 본령이었다”라고 밝혔다. 

 

김일성 주석이 국민을 믿고 국민 속에 들어가는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게 된 출발점은 1920년대 독립운동 현황이 주는 교훈이었다고 한다. 

 

1920년대 조선 독립운동의 상층부는 분열돼 서로 견제하며 싸움을 벌였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우리역사넷’ 홈페이지에 따르면 민족주의운동 계열은 3·1운동 이후 어떤 세계관에 입각해서 민족운동을 전개할 것인가, 그리고 독립 후에 어떠한 정치체제를 수립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부르주아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으로 분화하였고, 분화된 조직 내외에서 사대주의와 파벌로 인한 패권분쟁이 격화되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그들의 행태가 전반적으로 사대주의와 파벌싸움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의 행태를 목격하면서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박한식, 「주체사상(2)」, 한겨레, 2020.3.3.)

 

김일성 주석이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해답을 찾은 것이 바로 국민이었다고 한다. 즉, 큰 나라에 기대어 독립을 하자는 사대주의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힘으로 독립을 하자, 권력을 차지하려고 파벌싸움을 할 게 아니라 국민을 독립운동의 주인으로 내세우자는 게 김일성 주석의 결론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이런 판단을 내리고 국민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하는 활동을 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국민과 함께하려면 무조건 국민을 사랑해야 하며, 국민을 사랑하는 최고 표현이 국민을 항일운동의 주인으로 내세우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의 ‘이민위천’은 북한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 창시로 이어진다.

 

김효은 대진대 DMZ연구원은 ‘이민위천’과 주체사상과의 관계에 대해 “이민위천의 사상 정신으로 인민대중을 모든 것의 주인으로 내세우는 주체사상을 창시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민위천이야말로 혁명과 건설, 각 분야의 혁명 투쟁에서 승리하는 데 근본 원천”이라고 설명했다. (김효은, 「북한의 사상과 인민대중제일주의 연구」, 『통일정책연구』 vol.30, 통일정책연구원, 2021.)

 

항일무장투쟁과 ‘이민위천’

 

김일성 주석은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대원들에게 늘 국민을 강조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항일 빨치산 시절 ‘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처럼 유격대가 인민을 떠나 살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권경복, 「북한 사회 휩쓰는 대중운동 열풍」, 『통일경제』 2002년 2월호, 현대경제연구원, 2002.) 이 말을 풀이하면 유격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국민을 위해 투쟁하고, 국민을 위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 주석의 유격대는 국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마을에서 머무르거나 잠을 자야 할 때도 주민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마을을 청소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의 이런 뜻을 엿볼 수 있는 것이 항일유격대의 ‘잠행조례’다.

 

“제1조: 본군은 일본제국주의와 그 주구들을 반대하여,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이다.

제2조: 본 군은 ‘조선 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로서 조직된 진정한 ‘조선 인민’의 혁명군대라고 밝히였다.

제3조: 본 군은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고 ‘인민’의 생명 재산을 옹호 보위하며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한다.

제4조: 본 군의 지휘 성원들과 대원들은 옹군애민, 관병일치의 정신에서 군기와 풍기를 자각적으로 준수한다.” (김상일, 「일본을 혼줄 낸 ‘김일성 괴담’은 ‘인민적 성격’」, 통일뉴스, 2008.5.12.)

 

또한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국민을 진심으로 대하고 존중했기 때문에 김일성 주석을 따르고 유격대를 도와주며 함께 싸운 사람들이 많았다고 주장한다.

 

“김일성 주석이 북만에서 활동할 때 물고기와 식량 등을 공급했던 송덕보 한족 집안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김일성 부대는 싸움도 잘했지만, 특히 인정이 깊고 예의 바르며 주민들에게 피해를 절대 주지 않았음은 물론 마을 청소도 해주고, 장작도 패주고 일손도 도와주는 등 모범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모든 주민이 마음을 열고 김일성 주석의 항일을 도와 나섰다는 것이다.” (이창기, 「경박호는 동지애로 뭉친 북중혈맹의 상징」, 자주민보, 2011.6.23.)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 시절 국민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민생단 사건’이다.

 

민생단 사건은 1930년대 전반 간도(동만주)의 중국공산당이 건립한 유격근거지 내에서 당 조직과 유격대, 혁명적 군중의 절대 다수를 접하는 조선인들을 일제의 간첩으로 몰아서 대대적으로 처형한 사건이다. (한홍구, 「민생단 사건의 비교사적 연구」, 『한국문화』 25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0.) 

 

당시 분위기는 무척 살벌했다고 한다.

 

“살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잡혀가서 민생단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사람도 많았다. 집회에서 기침 한번 했다가 민생단원에게 암호 보낸다고 총살당하는가 하면 어제의 사형집행자가 오늘은 민생단원으로 둔갑해 형장으로 끌려갔다.” (김명호, 「서로 ‘일본첩자’ 의심하며 죽인 ‘민생단 사건’…김일성이 종지부」, 한겨레, 2014.3.3.) 

 

김명호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민생단 분위기는 오늘날의 마녀사냥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마녀사냥으로 누군가 몰리면 그 사람을 옹호해주기 쉽지 않다. 

 

그런데 마녀사냥과 같은 민생단 사건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이 김일성 주석이었다고 한다. 김명호 교수는 김일성 주석이 “마안산에 감금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던 민생단 혐의자 100여 명을 석방”했으며 “그들에게 누명을 씌운 민생단 자료를 불살라 버렸다”라면서 김일성 주석이 “민생단 사건에 마침표를 찍었다”라고 밝혔다.

 

또 김일성 주석이 민생단으로 몰려 희생된 사람의 자녀들을 목욕시키고 그들에게 옷을 새로이 해 입혔다고 밝혔다. 이 때 옷을 해 입히는데 쓴 20원은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가 유산으로 물려준 돈이라고 한다. (김명호, 앞의 글)

 

관련하여 김일성 주석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때를 돌아보면서 20원으로 아이들에게 모두 새 옷을 해 입히기에 부족해 장울화(김일성 주석의 중국인 동료로 부잣집 출신이었다)에게 편지를 써서 옷감을 더 마련했다고 밝혔다. 김일성 주석은 “우리는 그 천으로 밀영의 아이들과 ‘민생단’ 누명을 벗어내치고 새 사단에 편입된 100여 명의 유격대원들에게 옷을 다 해 입히었다. 그리고 나니 무거웠던 내 마음도 어느 정도 가벼워졌다”라고 감상을 적었다.

 

후에 김일성 주석은 “평생 제일 잘한 일이 육문중학 들어간 것과 민생단 자료 불살라 버린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김명호, 앞의 글)

 

모든 것의 시작과 끝 ‘이민위천’

 

김일성 주석은 해방 후 나라를 이끌어가는 데서 ‘이민위천’을 모든 것의 시작으로 삼았다고 한다.

 

북한 자료에 따르면 해방 후 노동당과 정부에서 일하는 간부들 중에는 과거 ‘계급사회’의 낡은 관료문화를 흉내 내며 국민 위에 군림하거나 특권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이런 관료주의를 경계하면서 간부들에게 ‘이민위천’을 자주 강조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해방 후 북한에서 정권을 수립한 후 당 일꾼들 속에서 ‘인민’에게 복무하는 정신과 기풍을 확립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사회주의 집권당에서는 세도와 관료주의를 경계해야 하며 이를 몰아내는 투쟁을 쉼 없이 벌여야 한다는 점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 (정대일, 「이민위천의 원리적 기초」, 현장언론 민플러스, 2021.4.18.) 

 

이와 같은 정치는 한국전쟁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도 펼쳐졌다고 한다. 

 

평양시민 김련희 씨는 “(한국전쟁으로) 남쪽도 파괴되었지만, 북쪽은 완전히 파괴되었어요. 그때 북에서 뭘 했느냐면요, 김일성 주석이 전국에 흩어져 있던 전쟁고아들을 모아서 동유럽 나라에 의탁 공부를 내보냈어요. 부모 없는 어린애들을 내보내면서 해외에 나가면 조국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그 애들에게 담당 교사를 다 붙여서 내보냈어요. 그때는 총을 잡고 싸워야 할 사람 1명이 더 필요할 때였어요. 그러나 전선에서 교사들을 소환해요 …(중략)… 그 이후 전쟁이 끝나고 새 조국 건설을 시작할 때 그 아이들을 다시 불러들여요. 대학 갈 아이들은 다시 해외로 유학을 보내요. 소련의 아카데미나 종합대학에요. 그 아이들이 남아서 새 조국 건설의 기초가 돼요. 북한 지도자는 전쟁 중에 이런 부분까지 세심하게 챙겨주는 지도자였던 거죠”라고 자신의 책에서 밝혔다. (김련희,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 615, 2017.)

 

전쟁 이후 국정에서도 김일성 주석이 택한 방법은 국민 속에 들어가 함께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서대숙 교수는 “(김일성 주석이) 스스로 세운 ‘이신작칙’의 원칙에 따라 방방곡곡을 누비며 현지지도를 다녔”으며 “광산에 가서 광물을 캐려면 어떤 도구를 써야 한다는 것에서부터 청산리농장이나 대안기계공장에 이르기까지 현지 주민들과 함께 일”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이신작칙은 남보다 먼저 실천하여 모범을 보인다는 의미이다. 

 

서대숙 교수가 언급한 김일성 주석의 청산리농장 현지지도는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의 시작이 되었다. 김일성 주석은 1960년 2월 평안남도 강서군 청산협동농장을 15일간 현지지도하면서 청산리방법을 마련했다고 한다. 청산리정신의 기본 내용은 “인민대중의 이익을 위하여 충실히 복무하고 ‘인민’들의 생활 문제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지는 입장”이며 “사회주의·공산주의 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인민’의 힘과 지혜에 철저히 의거하여 풀어나가는 정신”이라고 한다. 그리고 청산리방법의 내용에는 “늘 현지에 내려가 사정을 깊이 알아보고 문제해결의 옳은 방도를 세우”라는 것도 있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산리방법’ 항목)

 

손원태 선생은 인민대학습당 건설과 관련한 일화도 소개하였다. 

 

인민대학습당은 평양의 중심 남산재(평양에 있는 산)에 있다. 10만 m²에 이르는 연건축면적으로 지어진 인민대학습당은 북한을 방문하는 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전후에 도시 복구를 위한 건설 사업이 시작되어 새집들이 많이 지어질 때도 그 자리는 오래도록 공터로 남아있었는데, 그것은 김일성 주석이 평양의 중심부인 그 자리를 아끼며 어떤 건물을 앉힐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체로 다른 나라 도시들의 모습을 보면 그런 도시 중심부에 정부 청사나 대통령궁 같은 통치와 관련된 기관의 건물을 앉히는 것이 상례이다. 모스크바의 크렘린이나 워싱턴의 백악관 같은 것이 다 도시 중심부에 자리를 틀고 앉아 위엄을 보이고 있다. 당연히 평양에서도 그곳에 정부 청사나 주석궁 같은 것을 앉혀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지만, 김일성 주석은 바로 그 자리에 인민대학습당을 세우자는 안을 내놓았다고 한다. 정부 청사가 아니라 온 나라 ‘인민’이 다 와서 학습하는 거창한 교육문화기관인 인민대학습당을 세우자고 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김일성 주석의 ‘이민위천’ 사상이 정치에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생동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손원태, 앞의 책)  

 

또한 인민대학습당이라는 이름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함께 제안한 것이라고 한다. (강진규, 「북한 인민대학습당, 15만6900건 과학기술자료 구축」, NK경제, 2022.3.31.)

 

이처럼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이민위천’을 항일무장투쟁 시기부터 국가건설 그리고 국정을 운영하는 데서 일관하게 구현하며 국민을 사랑하며, 나라의 주인으로 내세워 왔기에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나라’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3. 김일성 주석의 ‘이민위천’이 북한 사회에 미친 영향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20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75돌 경축 열병식에서 북한 국민에게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개인의 일보다 나라의 일을 더 걱정해주는 국민이라며 ‘위대한 인민’이라는 표현을 자주 하면서 고마움을 표시한다.

 

서대숙 교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감사를 표한 ‘위대한 인민’은 저절로 성장한 게 아니라 ‘이민위천’으로 한생을 살아 온 김일성 주석의 ‘업적’이라고 주장한다. 

 

서 교수는 “(김일성 주석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북한 주민들을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지닌 ‘주체적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라며 “북한 주민들이 전쟁 복구에 많은 고생을 했”는데 “주민들의 인내와 노력을 끌어내고 지도한 사람”이 바로 김일성 주석이라는 것이다. (서대숙, 앞의 책) 

 

서 교수가 언급한 ‘주체적 인간’은 북한 국민이 전후 복구 과정에서 천리마운동 등을 통해 보여주었듯, ‘지도자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면서 국가의 일을 자기의 일보다 소중히 여기며 국가발전을 위해 애쓰는 국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이민위천’을 강조하고 현실 정치에 적용하는 지도자, 그리고 그 지도자를 따르는 ‘위대한 인민’이 하나로 뭉쳐 ‘일심단결’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일심단결로 국가의 어려움을 이겨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일심단결을 마련하게 한 김일성 주석의 ‘이민위천’은 지금까지 북한 사회를 발전시켜 온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김 영 란 기자  자주시보 4월 7일 서울 

북한은 올해 1월 조선노동당 제8기 제6차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김일성 주석 탄생 110돌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탄생 80돌을 “승리와 영광의 대축전”으로 “성대히 경축”하겠다고 하였다. 통일의 상대방인 북한이 국가 차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계기에 대해 우리도 학술적으로 자세히 연구하는 게 통일을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자주시보와 주권연구소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기획연재를 10회에 걸쳐 준비하였다. 

 

 

3. 김일성 주석의 ‘애민’ 사상

 

1.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나라’ 

 

북한은 헌법 서문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주체적인 혁명노선을 내놓으시고 여러 단계의 사회혁명과 건설 사업을 현명하게 영도하시어 공화국을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나라로, 자주, 자립, 자위의 사회주의국가로 강화 발전시키시었다”라고 밝혔다.

 

북한이 말하는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 나라’에 대해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라의 주인은 ‘인민’이기 때문에 인민대중 자신이 주인이 되어 ‘인민’의 정치를 실시하며 모든 것이 ‘인민’ 자신을 위해 복무하게 한다는 뜻이다.” (김이경, 『좌충우돌 아줌마의 북맹탈출 이야기』, 내일을 여는책, 2019.)

 

북한을 방문한 다른 사람들 역시 북한이 ‘국민 중심의 나라’이며, 여기에 김일성 주석의 지도가 있었다고 증언한다. 

 

독일의 유명한 소설가인 루이제 린저는 1980년, 1981년, 1982년 세 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과도 몇 차례 대화를 나눴다.

 

린저는 ‘인민과 더불어’라는 소제목이 붙은 방북기에서 “내가 체험한 바로는 김일성 주석은 실제로 탁자 앞에만 앉아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들에게로 가서 그들의 입장이 되어 자극을 주고 조언을 받아들인다. 평양에서 치밀하게 짜여져 나오는 계획들은 김일성 주석이 현장에서 농업전문가들 및 노동자들과 협의한 결과물”이라고 썼다. (루이제 린저, 『또 하나의 조국 - 루이제 린저의 북한방문기』, 공동체, 1988.)

 

항일운동 당시 김일성 주석과 깊은 인연이 있었던 손정도 목사의 아들이자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의료인과 종교인의 삶을 살았던 손원태 선생도 회고록에 방북 당시의 감상을 담았다. 

 

“북조선에는 ‘인민’이라는 낱말이 도처에 있다. 정부 기관은 인민위원회, 군대는 인민군대, 소학교는 인민학교, 병원도 인민병원 그리고 인민배우, 인민기자, 인민교원 등등 가장 높은 명예 칭호에도 인민이라는 말이 붙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의 구호나 선전 문구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그대로 정치의 중심사상으로, 방식으로 되고 있으며 실천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손원태, 『내가 만난 김성주-김일성』, 동연, 2020.)

 

김일성 주석과 ‘인민’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자. 

 

2. 김일성 주석과 ‘이민위천’

 

‘애민’정치의 시작 ‘이민위천’

 

김일성 주석의 좌우명은 ‘이민위천’이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민위천’, 인민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이것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었다.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그 힘에 의거할 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 신앙이며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한생을 인민을 위하여 바치게 한 생활의 본령이었다”라고 밝혔다. 

 

김일성 주석이 국민을 믿고 국민 속에 들어가는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게 된 출발점은 1920년대 독립운동 현황이 주는 교훈이었다고 한다. 

 

1920년대 조선 독립운동의 상층부는 분열돼 서로 견제하며 싸움을 벌였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우리역사넷’ 홈페이지에 따르면 민족주의운동 계열은 3·1운동 이후 어떤 세계관에 입각해서 민족운동을 전개할 것인가, 그리고 독립 후에 어떠한 정치체제를 수립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부르주아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으로 분화하였고, 분화된 조직 내외에서 사대주의와 파벌로 인한 패권분쟁이 격화되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그들의 행태가 전반적으로 사대주의와 파벌싸움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의 행태를 목격하면서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박한식, 「주체사상(2)」, 한겨레, 2020.3.3.)

 

김일성 주석이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해답을 찾은 것이 바로 국민이었다고 한다. 즉, 큰 나라에 기대어 독립을 하자는 사대주의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힘으로 독립을 하자, 권력을 차지하려고 파벌싸움을 할 게 아니라 국민을 독립운동의 주인으로 내세우자는 게 김일성 주석의 결론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이런 판단을 내리고 국민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하는 활동을 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국민과 함께하려면 무조건 국민을 사랑해야 하며, 국민을 사랑하는 최고 표현이 국민을 항일운동의 주인으로 내세우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의 ‘이민위천’은 북한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 창시로 이어진다.

 

김효은 대진대 DMZ연구원은 ‘이민위천’과 주체사상과의 관계에 대해 “이민위천의 사상 정신으로 인민대중을 모든 것의 주인으로 내세우는 주체사상을 창시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민위천이야말로 혁명과 건설, 각 분야의 혁명 투쟁에서 승리하는 데 근본 원천”이라고 설명했다. (김효은, 「북한의 사상과 인민대중제일주의 연구」, 『통일정책연구』 vol.30, 통일정책연구원, 2021.)

 

항일무장투쟁과 ‘이민위천’

 

김일성 주석은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대원들에게 늘 국민을 강조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항일 빨치산 시절 ‘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처럼 유격대가 인민을 떠나 살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권경복, 「북한 사회 휩쓰는 대중운동 열풍」, 『통일경제』 2002년 2월호, 현대경제연구원, 2002.) 이 말을 풀이하면 유격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국민을 위해 투쟁하고, 국민을 위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 주석의 유격대는 국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마을에서 머무르거나 잠을 자야 할 때도 주민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마을을 청소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의 이런 뜻을 엿볼 수 있는 것이 항일유격대의 ‘잠행조례’다.

 

“제1조: 본군은 일본제국주의와 그 주구들을 반대하여,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이다.

제2조: 본 군은 ‘조선 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로서 조직된 진정한 ‘조선 인민’의 혁명군대라고 밝히였다.

제3조: 본 군은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고 ‘인민’의 생명 재산을 옹호 보위하며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한다.

제4조: 본 군의 지휘 성원들과 대원들은 옹군애민, 관병일치의 정신에서 군기와 풍기를 자각적으로 준수한다.” (김상일, 「일본을 혼줄 낸 ‘김일성 괴담’은 ‘인민적 성격’」, 통일뉴스, 2008.5.12.)

 

또한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국민을 진심으로 대하고 존중했기 때문에 김일성 주석을 따르고 유격대를 도와주며 함께 싸운 사람들이 많았다고 주장한다.

 

“김일성 주석이 북만에서 활동할 때 물고기와 식량 등을 공급했던 송덕보 한족 집안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김일성 부대는 싸움도 잘했지만, 특히 인정이 깊고 예의 바르며 주민들에게 피해를 절대 주지 않았음은 물론 마을 청소도 해주고, 장작도 패주고 일손도 도와주는 등 모범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모든 주민이 마음을 열고 김일성 주석의 항일을 도와 나섰다는 것이다.” (이창기, 「경박호는 동지애로 뭉친 북중혈맹의 상징」, 자주민보, 2011.6.23.)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 시절 국민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민생단 사건’이다.

 

민생단 사건은 1930년대 전반 간도(동만주)의 중국공산당이 건립한 유격근거지 내에서 당 조직과 유격대, 혁명적 군중의 절대 다수를 접하는 조선인들을 일제의 간첩으로 몰아서 대대적으로 처형한 사건이다. (한홍구, 「민생단 사건의 비교사적 연구」, 『한국문화』 25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0.) 

 

당시 분위기는 무척 살벌했다고 한다.

 

“살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잡혀가서 민생단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사람도 많았다. 집회에서 기침 한번 했다가 민생단원에게 암호 보낸다고 총살당하는가 하면 어제의 사형집행자가 오늘은 민생단원으로 둔갑해 형장으로 끌려갔다.” (김명호, 「서로 ‘일본첩자’ 의심하며 죽인 ‘민생단 사건’…김일성이 종지부」, 한겨레, 2014.3.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첫페이지  |   코레아뉴스  |   성명서  |   통일정세  |   세계뉴스  |   기고

Copyright ⓒ 2014-2024 [기획연재3] 김일성 주석의 애민사상 > 코레아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