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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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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01 14:1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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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글쓴이: 다물흙, 림원섭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12
미 정부의 사전 시나리오에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한 계획들이 있었다. 그렇게 세운 계획들 중 하나로 요시찰인에 대한 검거 학살 계획이 있었다. 중국대륙을 목표로 한 군사작전을 수행하는데 조금이라도 차질을 빚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철저히 장해물을 제거 하였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연행과 구금조치는 1950년 6월25일 전쟁 당일 시작되었다고 진실화해위는 밝혔다.


 그리고 유엔에서 미국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기 위해 6.25 전쟁발발 전에 미리 계획해둔 규탄성명을 발표하고 유엔군을 조직하는 작업을 일사천리 준비대로 신속 완벽하게 진행하였다 “유엔담당 미 국무차 관보 존 D. 히카슨 증언에 의하면 미국은 북침을 감추고 북한이 침략한 것으로 날조시키기 위한 ‘유엔결의 초안’까지 전쟁 전에 제 마음대로 조작해 완비하고 있었다.


1951년 6월 5일 미 상원세출위원회의 국무성 예산에 관한 실무적인 청문회에서 죤 디 히카슨은 한국전쟁발발과 관련하여 유엔에 제출할 <결의안>이 전쟁 전에 작성되었다 고 증언하였다 이는 ‘NSC-68’에 따라 수립된 계획으로서 UN군의 한국전쟁 참전이 전쟁 전 미국의 ‘NSC-68’에 따라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1950년 4월2일 미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비준된 ‘NSC-68’에는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을 투입하기 위한 계획이 단계 별로 명시되어 있다. ≪1964년 4월 13일자 뉴욕타임스에서≫ 소련이 유엔에 항의하여 불참한 시기를 이용하여 미국은 전쟁발발 날짜를 잡았습니다.


소련은 중국공산당의 국가수립 선포이후에도 이유 없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는 유엔 결정에 항의하기 위해 1950년 1월부터 유엔을 보이콧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안보리에서 유엔군의 한국전 파병이 쉽게 결정 되었다.


소련이 거부권 행사를 포기하고 안보리에서 기권하였기 때문에 유엔군이 파병될 수 있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련이 유엔군 파병에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미국은 유엔총회에서 유엔군참전의 결정을 이끌어 냈을 것입니다.


48년2월26일 한국에서의 선거의 가부를 묻는 표결에서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보이콧으로 부결되자 미국은 유엔 총회에 상정하여 우리민족에게는 발언권을 주지 않고 민족의 뜻과는 배치되는 남한만의 (( 이미 천명한대로 소련과 북한이 유엔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표결이 실시된 것이므로 이 결의안이 남한에만 미친다는 것을 회원국은 이미 알고 통과시킨 것이다. )) 유엔감시하의 단독선거를 결정하였습니다.


우리민족은 스스로 선거를 치를 능력이 부족하다는 전제하에 내려진 이 같은 결정을 우리민중들은 반대하여 항거하였고 많은 사람이 미군의 지령을 받은 친일반역자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자주적으로 감시가 없는 자유스런 축제분위기 속에서 해방된 조국의 첫 선거를 하고 싶었고 친일매국노 가 날뛰는 분단이 확실한 반쪽짜리 선거를 원치 않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유엔한국위원 단(UNCOK)은 북한 남침에 의해 일어난 전쟁이라면서 미국이 제시한 자료를 그대로 유엔에 보고함으로써 유엔군 참전 결정을 이끌어냈다.


 1949년 대륙에서 중국공산당의 국가수립 선포이후에도 이유 없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고 일개 섬에 불과한 국민당의 타이완 정부가 22년 동안이나 유엔에서 중국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대신하여 유엔의 회원국은 물론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의 지휘를 버젓이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엔을 쥐락펴락 제 마음대로 주무르고 전횡을 일삼는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잡지 《라이프》는 50년 8월호에서《전쟁개시에 이르러 이번 전쟁만큼 완전히 준비되었던 전쟁은 우리들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없었던 일이었다.》라고 썼다. 당시 미극동군사령부에서 참모로 근무한 에이다는 《한국전쟁은 일본에 있는 미군총사령부의 직접 명령에 의하여 남한군이 개시하였다》라고 폭로하였다. 

「유에스뉴스 앤드 리포드」1945년 12월 10일호에서 미10군단장 ‘오르몬드’ 는 『중국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한국처럼 편리한 보급로는 없다. 육, 해, 공군의 동원이 한국보다 더 좋은 지역은 없다. 한국은 제1급의 전략적 지역이다.』라고 하였다. 미

 경제원호처 한국과장이었던 존슨은 1950년 5월 미 하원 세출위원회에서 『한국군은 미국무기로 무장하였으며 서울의 미 군사사절단의 지도하에 미국 장교들에 의하여 훈련받은 10만의 한국군이 모든 준비를 끝마쳤으며 언제든지 한국에서 전쟁을 개시할 수 있다』고 보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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