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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15.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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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10 03:5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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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글쓴이: 다물흙, 림원섭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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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이승만 정권을 북침전쟁의 길로 내몰기 위해 1949년 한해에만도 10만5000 정이상의 각종 최신보병총과 2000정이상의 중기관총과 경기관총 그리고 5000만발 이상의 탄약 수많은 각종 포들과 그에 따르는 막대한 양의 포탄들,5000대의 군용 차들과 79척의 함정과 20대의 비행기를 제공하였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두고 당시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트는 남한의 한개 연대는 북한의 한개 여단에 대항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맥아더의 수수께끼> 일문,1951년판 258쪽 무기를 공급한 것은 이승만에게 미국이 지원한다는 것을 보여줘서 전쟁의 불집을 안심하고 터뜨리라고 공급한 것입니다.


한국에 파견된 미 군사고문단 단장 로버트는 1950년 1월에 “북벌계획은 결정된 문제이다. 이것을 실현 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북진통일을 간청하는 이승만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침공을 개시한다 할지라도 정당한 이유를 가지기 위한 여러 조건들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전쟁은 미국에 의해 발발된 전쟁이고 북한에게는 강요된 전쟁이었다. 6.25 이전에도 수차례 전쟁의 불을 지피기 위해 실제로 군사공격을 시도하였다.


‘호림虎林부대 사건’은 국군과 서북 청년단이 유격대를 조직한 다음 1949년 6월 29일에 설악산 및 금강산 줄기를 타고 들어가 원산 남방 안변 지구까지 침투한 사건이었다. 그 예로 1949년 6월 7일에는 남한 군이 북한군을 가장하여 38선 으로 부터 북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한 고지를 점령하기도 하였고, 같은 해 6월 17일에는 38선 이북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태탄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6월 18일에는 은파산을 점령하였었는데, 이 전투 때에는 개인 화기뿐만이 아니라 포까지 동원되었다. 

처음에는 이 전투에 남한이 더 적극적이 였으나, 이후에는 북한이 더 적극적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1949년 8월에는 춘천과 홍천, 그리고 인제 일대에서 남북한 정규군간의 전투가 무려 19일 동안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남한 군이 침입한 횟수는 432회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회는 비행기 침입, 42회는 함대습격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충돌은 황해도 옹진에서 강원도의 양양까지 걸쳐져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국부적 충돌이 아닌 말하자면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셈이었다. 그 가운데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부근에서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이 지역들은 1950년 6월 25일에 인민군이 주 공격지역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전쟁의 원인은 6.25 남침에 의한 것이 아닌, 여러 작은 북침전쟁을 수없이 도발한 데에 있었다. 반복된 북침에서 북침의 주체는 괴뢰군이 될 수 없고 당연히 지휘권을 쥔 미군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미국은 북한 정권을 전복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미국은 이렇게 북한을 붕괴 시키려는 기도가 좌절 될 경우 전쟁을 통해서라도 목적을 달성 하려고 계획 하였다. 애치슨 선언이 있기 전부터 북파공작원의 침입을 받아온 북한 정권은 미국이 결국은 전쟁을 통해 자신을 붕괴시키리라고 예상하였다. 

 1946년 미군 24군단 정보처는 산하에 ‘442CIC’라는 첩보부대를 창설했으며, 이 부대는 1948년 여러 반공단체와 통합해 KLO(Korean Liaison Office) 부대가 된다. (KLO를 흔히 ‘켈로’ 부대라고 불렀다) 8240부대로도 불린 켈로 부대는 특수임무의 수행을 위해 북한에 파견되어 적 생포 및 사살 적군 진지 주요 시설물 폭파 및 각종테러를 통한 사회혼란 첩보 수집 첩보망구축. 중요 요인의 암살. 주요 공공기관을 방화하여 혼란을 부추기는 역할 등을 수행했다.


또한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착용하고 육해공군의 물적 보급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자급 자족으로 해결하며 임무수행 중 부상이나 임무수행 불가능 상태에서는 자결이나 자폭의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46년 3월 1일 평양역 앞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 수류탄을 투척한 것을 들 수 있다. 

평양역 앞 광장에서 열린 북한의 3·1절 기념행사에서 김일성 암살을 목적으로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소련군 노비첸코 중위가 터지려고 씩씩 소리를 내는 수류탄을 집어들고 주석단에서 내리뛰어 김일성 등의 지도부를 구했다. 당시 소련 장교 노비첸코의 헌신적인 경호로 김일성은 무사하였으나, 노비첸코는 오른팔을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


(노비첸코는 제대 후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다가 1984년 訪蘇한 金日成과 재회했다. 그후 노비첸코는 북한으로부터 「노동영웅」 칭호를 받고, 金日成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 당국으로부터 극진한 예우와 지원을 받았다. 2002년 8월 러시아를 방문한 金正日은 노비첸코의 유가족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귀국길에도 보시비르스크에서 노비첸코의 유가족들을 만나 감사를 표했다.)


이러한 테러는 CIA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백의사가 일으킨 것으로 이 백의사와 CIC (주한미군방첩대) 가 공동으로 정릉의 대북암살단훈련원을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군번 없는 용사로 불리우는 북파공작원은 6.25전 해방 후부터 미국 정보기관의 지원 하에 비밀리에 양성되어 전쟁 시에는 6,000여명에 이르렀다. 전시에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라는 정식 호칭이 붙여졌다.


미군정 치하에서 보내진 북파간첩 가운데 실종된 사람이 10,726명에 이른다고 한다. 오늘날 테러와의 전쟁을 한다고 하지만 테러의 원조는 미국입니다. 테러는 막아야지 전쟁을 일으킬 구실은 될 수 없습니다.


죄 없는 민간인을 죽인다면 테러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살인의 규모로 봐서 비교가 되지 않는 테러보다 더한 테러가 아닙니까? 테러를 핑계로 테러보다 더한 테러를 저지르는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 이 우주에도 그런 후안무치한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6-17 05:00:04 문화/역사/남북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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