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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20.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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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21 16:1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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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천불 나는 6.25 미침략 전쟁                                                                                    다물흙 림원섭 
 
이번 6.15 공동선언실천 유럽지역위원회 베르린 행사에서도 말을  했지만. 한 꽃이 피였다고 할 때 – 그 꽃이 핀 때부터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피게된 과정을 말을 해야하는 것과 같이  6.25는 – 완벽히 북침전쟁이다. 그 기록들은 확실한 과학이다. 

어떻게  1945년9월8일부터 1950년6월25일까지 미제는 냅다 총과 삐라를 뿌리면서 침략으로 한국 에 들어와 약 5년 동안에 한국땅에서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다.  그 행동들은 6.25를 만들기위한 준비였다. 완벽히 침략 대 살인 강도질을 위한 준비였다. 그 조작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서 38도 넘어 북을 향하여 도둑, 사기, 폭행, 매복, 강도, 강간, 방화, 살인, 포사격 등등 3200 (5200 북자료)회 북을 주야로 괴롭혔다.   

그러면서 군수물자를 만들기 위한 준비 단계였다. 그래서 왜놈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쫄딱 망했는데 이 6.25 침략 전쟁으로 부자가 되였다. 왜, 왜놈 나라는 수송이 가까운 대  군수공장이였다. 

그리고 오늘까지 미제는 70년 동안 대한민국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이득을 챙이고 있는가다.  이때 사용한 각종 총, 총알, 칼, 차량, 탱크, 포, 지뢰, 폭탄, 비행기 기타 각종 군수물자 심지어는 철조망까지 판자 조각들까지 다 미제것이였다. 

1. 9.8일 미침략 3명 학살로 시작 
2. 4.3 제주도 도민 대 학살 
3. 보도연맹 대 학살 
4. 6.25 미 침략전쟁으로 양민 5백만 대 학살 

5. 5.16박정희 군사 대 반란 
6. 5.18 광주 대 학살 
7. 칼 858 폭파 대 학살 
8. 14살짜리 효선이와 미선이를 미장갑차로 깔아 뭉개 죽여놓고 무죄로 한 대 학살사건 
9. 천안함 대 학살 사건 – 이 공로로 오끼나와 미군 기지 철수 연기

10. 한미합동 훈련장에서 터진 세월호 304명 대 학살  
11. 미 상전을 위한 각종 간첩 조작 사건
12. 미군은 한국땅에서 하루에 평균 5건씩 대 사고는 교통위반, 자연파괴, 푹행, 거짓, 사기, 도둑, 강도, 강간, 방화, 살인 등등이다. 5건x365일=1825건X70년= 12,7750건이다. 

13. 1956년부터 1996년까지 미핵무기 1720개 한국땅에 배치 
14. 매년 엄청난 국고금으로 미제 흔 무기들을 구입 
15. 한국땅에서 17년째 생체 실험을 하고 있다는 미국제 탄저균과 보툴리눔 엄청난 생화학무기   

이 종일, 숭일, 종미, 숭미 사대 매국 역적들인 이승만 일당들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주야로 충성을 다한 것뿐이없다. 기독교는 나라가 갈아지게 하는데  6.25 전쟁이 터지게한 대 공로자다. 왜놈 군대 50년 주둔을 위한 치안유지법이 있었던 것처럼 미군 70년 주둔을 위한 보안법이있다. 

역대 대통령들은 그 정치인들은 언론, 방송인들은, 각종 학자들은 육해공군 사관학교 출신들인 장교들과 그 장군들은 자국민 대 살인 법인 보안법 하나 철폐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 미국의 이익을 위한 충성자들이뿐 한국 국민들을 위한 애국자들이 아니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두 다 가짜였다.


남북-코리아 전쟁이 아니고 완벽히 미침략 전쟁으로 북미전쟁이다. 그것이 바로 한국은 침략자 미국을 도아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북동포들을 미군과 유엔 16개국과 같이 대량 학살했다. 그래서 북동포들도 살기위해서 총질을 해야만 했다. 북은 항일 투사님들이 세운 나라였고 남은 친일, 친미 사대 매국 역적들을 앞장세워 미국이 세운 식민지 노예땅으로써 무기수입 단골 손님일 뿐이다.  오늘까지 -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20

1950년 6월 11일 발령됐던 군부대 비상경계령이 6.25 하루 전인 24일 0시 갑자기 해제됐다. 더구나 병사들에게 외출과 휴가를 허용하였다 이에 따라 전 장병의 절반이 휴가와 외박을 갔고 육군본부 장교들은 전쟁 당일 새벽까지 댄스파티를 즐겼다.


이런 해이된 사건들이 워싱턴과 이승만과 한국군이 완벽히 삼위일체를 이루어 일어났다. 이와 같이지금 까지 인내하던 북한의 반격이 있자 미국은 기다리던 것이 왔다. 드디어 미국이 간절히 바라던 대대적인 전쟁이 주어져 미국의 능력을 또 한 번 펼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미국은 박헌영 등을 간첩으로 들여보내서 북한 사정을 알고 있었다. 박헌영이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에 갔을 때 미국으로 암호 전문을 보냈다. 북한은 자신이나 소련이 발송하지 않은 이상한 전파가 어디론가 발송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 풀 수 없는 암호 전신문은 김일성과 함께 간 일행이 발송한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쟁 준비 상황이었으므로 색출 보다는 협력이 필요한 시기이므로 덮는 수밖에 없었다. 소련에게 분열상을 보이면 믿음을 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발신자도 자신을 색출하여 전열을 흩뜨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암호발신을 감행한 것이다.


 김일성의 회고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전쟁 때 최고사령부주변에 반혁명분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조국의 운명과 직결된 극비자료들이 박헌영과 리승엽을 통해 계속 미국사람들에게로 날아갔습니다.  1952년 여름에 리승엽은 졸개들을 시켜 무전련락으로 최고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던 건지리골안에 미국비행기들을 수십 대나 불러들였습니다. 그 비행기들이 최고사령부주변을 발칵 뒤집어놓았습니다.


최고사령부 건물 곁에는 큰 시한탄까지 떨구고 달아났습니다. 내가 있던 집에서 그 시한탄까지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습니다. 그때 리을설이 비상회의를 열고 부관들과 호위성원들에게 결사전을 호소한 다음 당원증을 바치고 목도로 그 시한탄을 메다가 골짜기에 내던졌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리을설은 최고사령부주변에 잠복해있던 암해분자들과 반동분자들을 모두 잡아냈습 니다. 1952년 8월 3일 리승엽을 비롯한 13명이 '북한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피체되었다. 박헌영도 그들이 체포당하면서 그들의 '반란'에 대한 후원자로 몰리면서 가택 연금 당하였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3월 '미국의 스파이', '반당 종파분자' 등의 죄목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3월 31일 김일성은 평양 주재 소련 대사를 통해 박헌영과 그 추종자들이 당내에서 종파를 조직하고 정보를 미국에 빼돌렸으며 한국전쟁의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1955년 12월 15일,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북한에서 검사로 일하다가 남파되어 장기수로 복역했던 김중종은 공판을 직접 참관했다고 증언하였다. 김중종에 의하면 문제가 된 것은 박헌영의 집 지하실에 있던 무전기로서 이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국과 직접 접촉했던 증거라고 증언하였다.


박헌영은 6.25 당시 자기 집 변소에서 미군부대에 무전을 치다가 주세죽(前妻)에게 들켜 체포되었습니다.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은 1953년 박헌영과 리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의 거물 북조선 정치인들이 미국의 간첩으로서 정부 전복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최고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정식 명칭은 미 제국주의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이다.


이 사건의 피의자 13명 가운데 박헌영을 제외한 12명은 1953년 7월 30일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8월 6일 판결이 내려졌다. 박헌영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재판이 미루어지다가 2년 후인 1955년 12월 3일 기소되어 12월 15일에 판결을 받았다.


재판 결과는 피의자 전원 유죄 판결로,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원조와 윤순달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피의자들은 간첩 혐의와 반혁명적 모략, 무장 폭동 기도 혐의 등을 법정에서 전부 시인했다. 예를 들어 최후 진술에서 박헌영은 자신을 매국역적이라고 부르면서 그 죄악을 더 널리 알려달라고 말했으며, 리승엽은 생명이 둘이 있어 둘다 바친다 하더라도 사죄에는 모자란다는 표현을 썼다. 

박헌영 공판 마지막 날, 판사가 박헌영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일제 때 변절했던 것에 관해서 솔직히 밝히지 않았느냐?" 그러자 박헌영은 "일제 때 변절한 것을 밝히면 날 총비서 시켜주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박현영이 변절한 것은 '고문'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고, 박헌영이 '미제 간첩'으로 포섭될 수 있었던 것은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환웅사 1만년 
고조선 5200년 
단군사 4348년 
서양사/기독교 2015년6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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