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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31.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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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8-05 04:2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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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다물흙 림원섭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31.

한국전쟁은 군사적으로 미국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패한 첫 번째 전쟁이었으며 더러운 반칙을 하여 죽어서도 영원히 불명예를 씻지 못하는 전쟁이 되었다. 그 만큼 도덕적으로도 패하여 철저히 패배한 전쟁이었다. 하버드대 ‘제프리 페렛’ 은 ‘전쟁으로 만들어진 국가’라는 책에서 -

그리고 미국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던 보스톤 대학의 ‘앤드류 바세비치’ 교수는 ‘새로운 미국의 군국주의’ 라는 책에서 미국인들이 어떻게 전쟁의 유혹을 받는가 하는 것을 파헤쳤습니다. 미국은 2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졌음에도 세계 여러 나라를 상대로 300회 이상의 크고 작은 전쟁을 하였고 패배를 모르던 전쟁광이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하는 거대제국 미국이 조그마한 한반도를 차지한 걸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원자폭탄의 위력으로 세계를 놀라게까지 하였으니 미국의 야망은 하늘 높은 줄 몰랐습니다. 1951년 4월12일은 미소 양국의 공군사에 희비가 엇갈린 하루로 기록됐다. 미군은 중국인민 의용군의 후방 병참선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압록강 철교와 주변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무려 72대에 달하는 B-29 폭격기와 호위 임무를 맡은 F-80 전투기 32대를 한반도의 북쪽으로 출격시켰다. 

소련 공군도 이에 맞서 60대의 전투기를 발진시켰다. 약 40분에 걸쳐 치러진 공중전에서 소련 공군은 단 한대의 손실도 없이 B-29 폭격기 16대와 F-80 전투기 10여대를 격추시키는 완벽한 승리를 거뒀으며, 미 공군사에 이날은 ‘검은 목요일’로 기록됐다.

그 결과 극동 주둔 미 공군은 전략 폭격 능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 때문에 미국은 원폭을 투하하겠다는 구상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후 미국은 모의폭격 실험까지 실시하면서 북한과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원자폭탄으로 계속 위협하였다. B-29는 37개월의 전쟁 중 21일을 제외하고는 내내 하늘을 누볐다. 약 21,000 회의 출격에서, 167,000 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장소는 북 70여 곳, 남 30여 곳 정도이고 희생자 수는 약 500 만 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인민 의용군한테 밀려 퇴각하면서 원주, 의정부 등 작은 도시들까지 잿더미로 만들었다. 

네이팜탄이 이 도시들을 뒤 덮었다. 인민군이 퇴각할 때는 점령했던 마을의 학교나 건물을 그대로 남겨놓고 퇴각한 반면, 유엔군이 퇴각 할 때는 주둔했던 도시를 초토화하고 떠나는 것을 보았을 때에 인민군은 심지어 패해서 퇴각하더라도 도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외신들은 평했다. 

- 우리 어머님의 말씀은 인민군은 우리동내 김제평야에 와서도 호박한덩이도 손대지 아니했다 고 말씀을 하셨다. - 림씀. 

사찰 등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 임진왜란 때의 왜구들 보다 더 흉악한 유엔군이었습니다. 해방 후 친일 세력들은 인민이란 말은 북한이 사용한다고 금기 시켰습니다. 인민은 나라를 세우는 주체를 의미하고 국민은 그 나라에 속한 사람이란 뜻으로 수동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인민은 자연인으로서 국가가 있으나 없으나 존재하는 국가보다 상위 개념이고 국민은 국가에 복속된 하위 개념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국민이라고 하면 우리는 미국이 남한 땅에 세운 나라(괴뢰국가)에 수동적으로 속해있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나라를 세울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항일무장투쟁시절 김일성은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여 보천보전투 등 위험한 전투는 몸소 맡았습니다. 인민을 아끼고 사랑하는 모범을 스스로 보이셨습니다. 민족주의 진영이 이끄는 독립군의 항일 투쟁이 기진맥진했던 1930년대에 김일성부대는 북만주를 휩쓸었을 뿐 아니라 국내 진공에도 성공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함경북도 갑산군의 보천보 전투였다." 

지휘자는 25세의 청년 김일성(1912~1994). 밀림에서 낮을 보내고 밤 10시에 작전을 개시한 이들은 먼저 전화선부터 끊은 뒤, 주요 목표인 경찰주재소를 공격했다. 주재소에 있던 일본인 경찰 3명과 조선인 경찰 2명은 모두 도망쳤고, 이들은 무기고에서 경기관총, 소총, 권총, 탄약을 노획했다.

보천보 전투는 독립운동이 침체 분위기이던 때에 국내 진공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추격하는 일본군을 물리쳤다는 사실이 신문 보도와 입소문을 통해 퍼지면서, 김일성은 신비화됐고 민중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시기적 특성과 작전의 과감성, 언론 보도를 통한 사실 확산이 결합돼 나타난 결과였다. 

불의의 기습으로 일격을 당한 일제는 보천보 전투 뒤, 마에다 부대를 보내 뒤쫓지만 홍기하 전투에서 김일성 부대에게 또 다시 섬멸당한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7594) 홍기하 전투 현장에 중국 정부에서 세운 홍기하전투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비문에는  "1940년 3월 25일, 김일성 장군은 이곳에서 항일무장부대를 지휘하여 유인매복전으로 일위 '마에다 경찰토벌대'를 소멸하였다." - 화룡현 인민정부 연변대학민족연구소 세움 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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