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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13] 김일성-김정일주의 연구 입문 김일성-김정일주의는 어떤 과정을 거쳐 창시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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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9-06-17 17:3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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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13] 김일성-김정일주의 연구 입문


김일성-김정일주의는 어떤 과정을 거쳐 창시되었는가?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재미동포전국연합 

 

 

자주시대에 민중의 혁명투쟁의 앞길을 과학적으로 밝혀주는 위력한 지도사상인 김일성-김정일주의는 뛰어난 사상이론가인 김일성주석에 의하여 격동하는 20세기의 30년대에 창시되었다. 시대의 지도사상의 창시는 인류의 역사발전과 민중의 운명개척에서 극적인 전환을 예고하는 거대한 역사적 사변이다. 시대의 지도사상의 창시가 가지는 큰 의의는 그 어떤 거대한 과학 기술적 발견이나 발명이 가지는 의의에 비할 바가 못된다. 시대의 지도사상은 일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당대의 가장 선진적인 사상이론들을 전제로 하여 창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과 전제가 마련되었다고 하여 그것이 아무 때나 창시되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지도사상은 오직 도래하는 시대의 요구와 인류가 도달한 사상이론적 재부들을 한 몸에 체현하고 정력적인 사상이론 활동을 벌려나가는 탁월한 사상이론가가 존재할 때에만 자기의 탄생을 선포할 수 있다.

 

김일성주석은 민중의 탁월한 수령이 지녀야 할 모든 품격과 자질을 한 몸에 체현하고 20세기 역사의 흐름의 중심에 서서 민중의 혁명투쟁을 승리의 한 길로 이끌어온 혁명의 걸출한 지도자였다. 김주석이 이룩한 불멸의 혁명업적 가운데서 가장 높고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20세기 30년대에 시대의 지향과 민중의 요구를 명철하게 통찰하고 자주시대의 혁명과 건설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을 창시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발전의 영원한 시대인 자주시대의 혁명과 건설의 지도사상을 창시한 것으로 하여 김주석은 오늘도 주체의 위대한 지도자로 영생하고 있다. 탁월한 사상이론가로서의 천품을 타고난 김주석은 새로운 혁명의 길을 독창적으로 개척하기 위한 투쟁 속에서 시대의 지도사상이 창시될 수 있는 출발점을 발견하고 그에 기초하여 주체의 혁명원리와 혁명노선을 심오하게 천명함으로써 새 시대의 지도사상의 창시를 온 세상에 선포하였다.

 

김주석이 각양각색의 그릇된 사조가 어지럽게 범람하고 있던 시기에 인류의 밝은 미래를 영원히 담보하는 과학적이며 혁명적인 지도사상을 창시한 과정은 인류 사상사에 일찌기 있어 본 적이 없는 가장 비범한 사상이론 활동 과정이었다.

 

두가지 출발점의 발견

 

김일성주석이 자주시대의 과학적인 지도사상을 창시할 수 있은 것은 혁명실천 속에서 새로운 사상의 출발점으로 되는 두가지 진리를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사상이 나오자면 그 사상을 대표하며 그에 기초하여 다른 모든 사상이론들이 전개되어나가는 출발점으로 되는 진리가 발견되지 않으면 안된다. 새로운 진리, 새로운 출발점의 발견에 기초하여서만 지난 시기의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이 창시되고 전개되어나갈 수 있는 법이다.

 

지난 날 마르크스는 그의 경제학설의 핵을 이루는 <잉여가치 법칙>을 발견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에 기초하여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전면적으로 해부한 [자본론]을 쓰고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을 창시할 수 있었다. 레닌도 마르크스의 학설을 이어 독점자본주의를 분석한데 기초하여 자본주의의 불균등한 발전법칙을 발견함으로써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승리의 가능성을 밝히고 제국주의와 사회주의 혁명시기의 마르크스주의인 레닌주의를 창시할 수 있었다. 김일성주석이 창시한 김일성-김정일주의는 선행한 혁명사상과는 다른 새로운 출발점의 발견에 기초하고 있다.

 

김일성주석은 어린10대의 나이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한 몸에 지니고 혁명의 길에 나서 독창적인 사고와 실천으로 혁명의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나가는 과정에 혁명투쟁의 근본적 요구와 혁명실천의 경험과 교훈을 심오하게 분석통찰하고 새로운 시대사상의 출발점으로 되는 두가지 진리를 발견하였다.

 

김일성주석이 혁명투쟁에 나선 첫 시기에 발견한 혁명의 진리는 첫째로, 혁명의 주인은 민중이며 혁명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서는 민중 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조직동원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김일성주석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우리는 혁명투쟁에 나선 첫 시기에 인민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진리를 확신하고 주체사상을 창시하였습니다.”

 

김정일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수령님께서는 혁명투쟁에 나서신 첫 시기부터 이들의 잘못을 꿰뚫어보시고 이들과는 다른 길, 인민대중 속에 들어가 대중에게 의거하여 투쟁하는 참다운 혁명의 길을 걸으시었으며 혁명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인민대중 속에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조직동원하여야 혁명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밝히시었습니다. 이것이 주체사상의 출발점의 하나입니다.”

 

혁명은 민중의 힘을 발동하여 민중의 자주적 요구를 실현하는 투쟁이며 민중이 자기 자신을 해방하는 투쟁이다.  민중은 혁명사상으로 무장하고 조직된 정치적 역량으로 단결되어야 혁명에서 승리할 수 있다. 혁명가의 임무는 혁명의 주인인 민중 속에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조직하며 투쟁에 불러일으키는데 있다. 혁명역량도 민중 속에서 키워내야 하며 혁명투쟁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도 민중의 지혜와 힘에 의거하여 풀어나가야 한다. 민중을 떠나서는 혁명이 일어나고 승리할 수 없으며 혁명 그 자체에 대하여서도 생각할 수 없다. 민중이 있어야 혁명도 있고 민중에게 의거하여야 혁명에서 백전백승할 수 있다는 것은 일찍부터 아버님의 지원의 사상, 민중중시 사상으로 교양되고 이민위천을 자신의 둘도 없는 좌우명으로 간주한 김주석의 확고부동한 정치신조였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김주석은 혁명의 본성적 요구를 민중과의 관계에서 깊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1920년대에 조선에서 민족해방 운동을 한다고 하던 사람들은 민중 속에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조직화하여 혁명투쟁에 불러일으킬 생각은 하지 않고 대중과 이탈되어 영도권 싸움과 말공부만 하고 있었으며 대중을 단결시킨 것이 아니라 파벌싸움으로 분열시키고 있었다.

 

<한일합방> 직후부터 만주지방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민족주의운동 산하의 군소 독립운동 단체들은 독립운동 안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한 권력싸움을 일삼으면서 무수한 이합집산 과정을 거치었다. 이것들은 1925년 경에 이르러 대체로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의3부로 나뉘어져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으며 후에는 국민부로 통합되기는 하였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단합>이요, <통합>이요 하는 것은 다 민중들 속에서 체면이나 유지하여 독립운동의 영도권을 장악해보려는 의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들이 하는 행동이란 파벌을 축으로 하는 싸움질과 공리공담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무장단체들의 충돌로 하여 수백명의 열혈청년들이 죽는 <흑하사변>과 같은 유혈적 비극까지 빚어지게 되었다.

 

민족주의 운동가들에게 있어서 민중은 저들에게 군자금이나 바쳐야 하는 대상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민중 속에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불러일으킬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저마다 법을 제정하여 민중에게 내려 먹이었으며 민중에게서 기부금이나 군자금을 모아들이는데만 급급하였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군자금을 제대로 내지 못한다고 형벌을 가하고 더 많은 군자금을 걷어들이기 위해 파벌간 싸움을 벌리었으며 민중의 피땀이 어린 군자금마저 개인의 향락과 치부에 소비해버렸다.

 

초기 공산주의자들도 민중을 천시하고 멀리하는 데서는 민족주의자들보다 나은 데가 없었다. 조선에서 초기 공산주의 운동은 처음부터 그 뿌리를 알기 힘들 정도로 분열되고 뒤엉켜져 있었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가들이 벌리는 공산주의 운동의 총체가 분파투쟁이었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의 첫 시기에는 당시 국내에 있던 3개 분파(서울파, 화요파, 북풍회파)간의 싸움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 연장선 위에서 조선공산당 창건 후에는 새로운 분파들(엠엘파, 서상파)까지 나타나 영도권을 쟁탈하기 위한 격렬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결국, 조선공산당은 조직된 역량으로서의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고 태어난지 3년만에 국제당으로부터 제명되고 해산되는 가슴아픈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공산당은 해산되었으나 파벌싸움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으며<당재건>을 위한 파벌투쟁이 또 다시 시작되었다. 종파분자들의 안중에는 민중이란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민중은 저들이 국제당의 인정을 받고 다른 나라 당에 가입하기 위한 업적을 쌓기 위해 무모한 피를 흘려야 하는 한갖 수단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반일민족해방 투쟁을 지도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혁명의 대하인 민중 속에 몸을 담그지 않고 영도권 싸움과 말 공부만 하면서 대중을 분열시키는 조건에서 조선혁명의 앞길은 제대로 개척되어나갈 수 없었다. 김일성주석은 이러한 심각한 교훈으로부터 혁명에서 믿을 것은 오직 민중이며 민중 속에 들어가는데 혁명의 진로가 있다는 고귀한 진리를 밝히었다. 그가 천명한 혁명의 주인은 민중이라는 진리는 사회발전, 혁명발전의 기초에 <생산력> 발전을 놓고 그 생산력 발전의 담당자라는 견지에서 민중을 역사의 창조자로 보는 선행한 혁명사상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사회의 <물질경제적 관계>를 중심으로가 아니라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혁명사상을 창시할 수 있는 고귀한 출발점으로 되었다.

 

김일성주석이 혁명투쟁에 나선 첫 시기에 발견한 혁명의 진리는 둘째로, 매개 나라 혁명은 그 주인인 그 나라 민중이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김일성주석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나의 혁명활동은 민족해방투쟁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나는 민족의 주체, 혁명의 주체를 세우기 위하여 투쟁하는 과정에 우리 혁명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을 창시하였습니다.”

 

김정일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사대주의, 교조주의의 후과로부터 심각한 교훈을 찾으시고 혁명은 그 누구의 승인이나 지시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자기의 신념에 의하여 자기가 책임지고 하여야 하며 혁명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풀어나가야한다는 진리를 밝히시었습니다. 이것이 주체사상의 다른 하나의 출발점입니다.”

 

매개 나라에서 혁명은 그 나라 민중이 책임지고 자주적으로 하여야 하며 자기 나라 실정에 맞게 창조적으로 하여야 한다. 혁명투쟁은 사회적 인간, 민중의 생명인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이며 그것은 나라와 민족을 단위로 하여 각이한 발전 수준, 각이한 환경과 조건에서 진행되어나가는 것만큼 그 어느 혁명에나 다 들어맞는 만능의 공식이란 있을 수 없다. 자기 나라 혁명을 자신이 책임지는 입장에서 자체의 힘으로 자주적으로 벌려나가며 자기 나라의 구체적 실정에 맞게 창조적으로 벌려나가는 것이야말로 혁명투쟁의 가장 올바른 방법으로 된다. <자주성>과<창조성>은 혁명운동의 본성적 요구이다.

 

일찍부터 아버님의 투철한 민족자주사상으로 교양되면서 <민족자주>를 생명으로 간직하여온 김주석은 자주시대의 역사발전의 기본 흐름과 세계 혁명운동의 경험을 과학적으로 분석 총화하면서 자주성과 창조성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혁명운동의 본성을 그 누구보다도 깊이 꿰뚫어 보았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반일민족해방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 안에는 사대주의가 심하게 나타나 혁명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지난 날 나라를 망하게 한 사대주의의 악습을 답습한 민족주의자들과 행세식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체의 힘으로 혁명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외세에 의존하여 독립을 이룩해보려고 망상하였다.

 

완고한 민족주의자들은<교육과 산업의 진흥에 의한 국력배양 운동>을 <독립목적 달성의 가장 빠른 길>이라고 하면서 그 <힘의 준비>를 미국이나 프랑스를 비롯한 자본주의 열강의 <원조>에 의거하여 진행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숭미사대주의에 물젖은 일부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미제의 기만적인 <민족자결론>에 환상을 가지고 파리 강화 회의장에 찾아가 미국을 비롯한 협상국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구차한 청원놀음을 벌려놓기도 하였다. 그들이 어리석게도 <독립 청원서>를 들고 파리로 가 열강 대표들의 숙소를 찾아다니며 간절하게 호소도 하고 애원도 하였으나 열강들은 조선문제 같은 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결과로 차례지는 분배 몫을 더 많이 찾아먹겠는가 하는 데만 몰두하였다.

 

일제를 반대하여 무력항쟁의 길에 나섰다는 사람들도 자체의 힘으로 나라의 독립을 달성하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럭저럭 버티다가 대국들이 도와주면 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고 하면서 총 몇자루 구하는 것마저 남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민족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열강들에 대한 사대주의에 물젖어 있었다면 초기 공산주의자들 속에서는 소련에 대한 사대주의가 심하였다. 당시 공산주의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은 혁명을 하는데서 국제당의 승인과 인정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처럼 여기었다.

 

마르크스나 레닌이 혁명을 시작할 때 그 누구의 승인이나 인정을 받고 시작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사대주의가 골수에 찬 그들은 저마다 3인1당, 5인1파식으로 당파를 만들어 자기 파만이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라고 하면서 국제당에 승인을 받으러 다녔다. 파벌의 이름이 너무 자주 변하고 소련 행, 국제당 행이 너무도 잦은 탓으로 진짜 도장을 만들 사이가 없어 물렁물렁한<감자도장>을 만들어 찍었다는 비화가 바로 이때에 나오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식민지반봉건 사회였던 조선의 역사적 조건과 구체적 현실을 떠나서 기성이론과 남의 경험을 기계적으로 모방하려고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기성이론에 매달려 일본에서 프로레타리아 혁명이 승리하면 그 도움으로 나라의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소련에서의 사회주의 10월혁명을 기계적으로 모방하면서 조선에서도 당장 사회주의 혁명을 하고 소비에트 정권을 세워야 한다고도 하였다. 그들은 조선의 구체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혁명의 성격과 동력, 대상을 규정하려고 하지 않고 기성이론과 경험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 하는 기준에서 진리와 허위를 판정하였다. 이렇게 사대주의, 교조주의가 심하게 작용한 결과 자주성과 창조성을 본성적 요구로 하는 혁명운동의 앞길은 제대로 개척되어나갈 수 없었다.

 

김일성주석은 당시의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잘못에서 심각한 교훈을 찾고 혁명은 그 누구의 승인이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인인 자신이 책임지고 자기의 의사와 요구, 자체의 실정에 맞게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벌려나가야 한다는 새로운 진리를 밝히었다. 김주석이 새롭게 밝힌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혁명할데 대한 혁명의 진리는 시대적 및 역사적 조건으로부터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을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선행이론에서는 제기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모든 나라와 민족이 자주성을 지향해나서는 시대발전의 요구에 맞게 혁명의 새로운 길을 열어나가는 새로운 지도사상의 탄생을 안아올 수 있는 귀중한 출발점으로 되었다.

 

김일성주석이 혁명투쟁의 실천 속에서 혁명은 그주인인 민중에게 의거하여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하여야 한다는 고귀한 진리를 밝힘으로써 드디어 자주시대의 혁명사상의 창시를 온 세상에 선포할 수 있는 확고한 담보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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