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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예감 400] 군사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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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6-22 14:0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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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예감 400] 군사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한호석(통일학 연구소 소장 )  :  자주시보 

<차례>

1. ‘대적군사행동계획’ 작성하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2. 소규모 충돌이 확대되어 전쟁이 일어난다

3. 경무장 경찰대를 최전방에 배치한 사연

4. 미점령군이 후방으로 물러난 날 시작된 38도선 무력충돌

5. 최단공격선 차지하기 위한 개성지구전투

6. 전선을 축소하기 위한 옹진지구전투

7. 오늘의 군사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1. ‘대적군사행동계획’ 작성하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2020년 6월 17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이 담화를 발표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담화에서 6월 17일 현재 “구체적인 군사행동계획들이 검토되고 있”는데, “대적군사행동계획들을 보다 세부화하여 빠른 시일 안에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비준에 제기하도록 할 것”이라고 하면서, “전 전선에 배치된 포병부대들의 전투직일근무를 증강하고 전반적 전선에서 전선경계근무급수를 1호 전투근무체계로 격상시키며 접경지역 부근에서 정상적인 각종 군사훈련들을 재개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담화에서 언급한 ‘1호 전투근무체계’는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무기고에서 각종 군사장비와 실탄을 꺼내 중무장하고 전투명령을 대기하는 최고 수위의 전투동원태세를 뜻한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담화에서 언급한 ‘대적군사행동계획’은 한국군을 공격하는 작전계획을 뜻한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담화에서 언급한 ‘정상적인 각종 군사훈련들’은 한국군을 공격하기 위한 전투행동훈련을 뜻한다. 

 

이 글이 <자주시보>에 발표되는 2020년 6월 22일 현재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에게 1호 전투근무체계를 아직 명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1호 전투근무체계를 명령하기 전에 ‘대적군사행동계획’을 세부적으로 작성한 다음, 김정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검토를 받고, 최종적으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비준을 받기까지 약 2주 정도 걸릴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간파하면,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2020년 7월 중으로 중무장을 하고, 최고 수위의 전투동원태세를 취할 것이며, ‘대적군사행동계획’에 의거한 실전급 군사훈련을 실시할 것으로 예견된다. 그에 대응하여 한국군도 중무장을 하고, 비상태세에 돌입할 것이며, 대규모 군사훈련을 시작할 것으로 예견된다. 그렇게 되면, 전쟁발발에 아주 근접한 준전시상황이 조성되는 것이다. 

 

준전시상황이 조성되면, 군사분계선에서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나는 사태는 불가피해진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오늘까지 67년 동안 군사분계선에서 일어난 무력충돌사례는 이 글에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부지기수인데, 이제껏 군사분계선에서 일어난 수많은 무력충돌은 전쟁발발에 근접한 준전시상황이 아닌 평상적인 군사상황에서, 그야말로 우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군사긴장만 고조시켰을 뿐 국지전으로는 비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을 ‘배신자’로 낙인한 조선인민군이 징벌보복의지를 불태우면서 1호 전투근무체계에 진입한 상황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질 것이다. 우발적 무력충돌이 아니라 준비된 무력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만일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어느 한 쪽이 불꽃을 한 점이라도 날리는 순간, 불의의 교전이 벌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쌍방의 화력증원부대들이 일제히 불을 뿜게 될 것이다. 준비된 무력충돌은 국지전으로 비화될 것이며,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확전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2. 소규모 충돌이 확대되어 전쟁이 일어난다

 

돌이켜보면, 70년 전에도 그러했다. 70년 전 북은 남측 정부를 ‘매국도당’을 낙인하면서 ‘국토완정’을 추구했고, 남은 북측 정부를 ‘괴뢰집단’으로 낙인하면서 ‘실지회복’을 추구했다. 당시 북에서는 국토완정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고, 남에서는 실지회복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다. 북의 국토완정론과 남의 실지회복론은 38도선 무력충돌을 불러일으켰다.   

 

그처럼 38도선 무력충돌이 격화되고 있었던 1949년 6월 30일 미점령군이 철수했다. <조선중앙일보> 1949년 7월 2일부에는 미국 육군성이 6월 30일에 발표한 철군성명서 전문이 실렸다. 철군성명서는 다음과 같다. “미국 육군성은 유엔 결의에 의거하여 한국으로부터 미주둔군철퇴를 완료하였다. 따라서 동 부대는 하와이 및 미국 본토로 철수하게 될 것이다.” 소련군은 1948년 12월에 이미 철수했고, 미국군은 1949년 6월 30일 잔여병력 8,000명을 철수하는 것으로 철군을 완료했다. 

 

소련군과 미국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한 것은 그 두 나라가 합의하여 그어놓은 38도선이 존재리유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38도선이 존재리유를 상실했으므로, 민족주체력량으로 통일국가를 창건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소련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냉전의 시각에서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던 미국의 눈에는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건설운동이 아시아대륙으로 남하하는 소련의 팽창주의전략으로 보였다. 당시 미국이 한반도문제와 관련하여 작성한 모든 정책문서들과 정보문서들은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건설운동을 소련의 아시아 팽창주의전략으로 오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련의 아시아 팽창주의전략를 반대, 배격한 미국은 38도선 이남지역에 친미극우세력을 내세워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건설운동을 잔인무도하게 탄압하면서, 친미반공국가를 건설하려고 광분했다.   

 

38도선을 철폐하고 민주주의적 통일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전민족적 운동이 미국과 친미극우세력의 탄압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좌절되었을 때, 북은 38도선을 철폐한 국토완정을 필연적으로 선택했다. 그에 대항하여 남측 친미극우세력은 38도선을 철폐한 실지회복을 주장했다. <연합신문> 1949년 6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육군참모부장 정일권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38 이북의 실지회복에 있어서 가상 아닌 적이 엄연히 있다. 우리는 그 적을 압도적으로 단시일 내에 타도함으로써만 생명이나 물질의 막대한 손해를 최소한도로 멈출 수가 있는 것이고, 뜻하는 실지회복의 성스러운 민족과업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이 실지회복에 국민은 총궐기하여야 할 것을 거듭 강조하는 바이다.”

 

북의 국토완정의지와 남의 실지회복의지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사실상 준전시상태로 전변된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격화되었다. <조선일보> 1949년 6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국방군 제1사단장 김석원은 6월 14일 국방부 출입기자단과 회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금번 38선 각지에서 발생한 사태를 계기로 작금의 시국은 이미 전시체제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될 시기에 도달하였다. 그 이유로는 공산군이 아직까지 그 병력의 주력을 38선 후방에 두었던 것이 최근에 이르러는 차츰 최전선에 배치하고 있는 점이며 이에 따라 (아)군도 38선 최전선에서 이에 대비상태에 놓이게 된 점이다. 또한 전쟁이라는 것이 어느 때나 소규모의 충돌이 확대되어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니만큼 예정대로 되는 것도 아니므로 어느 때 어느 지점에서 일어날런지 모르는 것이다.” 

 

 

3. 경무장 경찰대를 최전방에 배치한 사연

 

김석원이 우려했던 대로, 38도선에서 일어난 대규모 무력충돌은 국지전으로 비화되었고, 격화된 국지전은 내전으로 확전되었다. 1949년 내내 일어난 38도선 무력충돌은 1950년 6월 25일 마침내 내전으로 폭발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38도선 무력충돌은 6.25전쟁과 떼어놓을 수 없는, 그 전쟁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자료를 살펴보면, 38도선에서 무력충돌위험이 조성되기 시작한 때는 1948년 7월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에 주재하는 미국 <합동통신(UP)> 특파원 제임스 로우퍼가 전한 1948년 7월 22일 서울발 보도에 따르면, 1948년 7월 20일 미점령군 병사 5명이 38도선 남쪽 약 360m 지점에서 경계근무를 하면서 옥수수밭을 지나가는 순간, 옥수수밭에 매복하고 있던 민간인 복장을 한 저격병들이 갑자기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며 기습하는 바람에 미점령군 병사 1명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 이것은 38도선에서 미점령군이 전사한 최초의 사건이었으며, 그로부터 약 2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예고한 사건이었다. 

 

1948년 8월 30일 오후 6시경 경기도 개성시 개풍군 여현리 38도선에서 남측 경찰대와 북측 경비대가 약 30분 동안 교전을 벌였다. 쌍방의 피해는 없었다고 했으니, 우발적인 총격전이었던 생각된다. 이것은 남과 북이 38도선에서 교전을 벌인 최초의 무력충돌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북측 경비대는 38도선과 선만(鮮滿)국경을 지키는 경비부대를 뜻한다. 1947년 2월 22일에 창설된 북조선인민위원회(처음에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라는 명칭을 썼음)는 내무국 산하에 3개 경비부대를 두었는데, 38도선을 경비하는 보안독립려단과 38경비보안대대, 그리고 선만국경을 경비하는 국경경비대대였다. 경무장을 한 38경비보안대대는 소규모 무력충돌에 나섰고, 중무장을 한 보안독립려단은 대규모 무력충돌에 나섰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자, 보안독립려단은 조선인민군 보병사단으로 개편되었다. 이 글에서는 보안독립려단, 38경비보안대대, 조선인민군 보병사단을 구분하여 표기하지 않고 편의상 인민군 전투부대로 통칭한다.

 

내무국 산하 보안독립려단의 초대 려단장은 항일전쟁에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으로 참전한 최현 항일혁명렬사(1907~1982)였다. 그의 선친은 홍범도 항일부대에서 활동한 최화심 항일투사이고, 그의 아들은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최룡해 위원장이다. 그런데 1949년 8월 7일 국방군 육군본부 정훈감실 보도과는 개성지구 전황을 언론매체들에게 전하면서 여단장 최현 소장이 국방군이 발사한 81mm 박격포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이런 사례가 말해주는 것처럼, 당시 국방군 육군본부가 발표한 전황자료들은 국방군의 전과를 크게 부풀려놓고, 인민군의 인명손실을 터무니없이 과장해놓은 것이므로 신뢰성을 갖지 못한다. 당시 국방군 육군본부는 38도선 전황에 관한 보도를 전면적으로 통제했으므로, 그들이 발표한 것 이외에 실제 전황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여기에 나오는 국방군은 남조선국방경비대의 후신이다. 미점령군은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했고, 그것을 1946년 3월에 설치한 국내안전부(Department of Internal Security) 산하기구로 만들었다. 1948년 8월 15일 미점령군이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할 때,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육군으로 개편되었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한국군이라는 명칭은 사용되지 않았고, 국방군 또는 국군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국방군으로 통칭한다. 

 

1949년 4월 4일 <동아일보>는 국방군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발표한 담화내용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38도선을 경비해오던 미점령군 부대들은 1948년 12월 15일 38도선 남쪽 후방지대로 물러났고, 1949년 1월 15일에는 더 남쪽에 있는 후방지대로 물러났는데, 바로 그때부터 국방군과 경찰대가 38도선을 경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유신문>이 1949년 5월 7일에 보도한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의 보고서에 따르면, “38선 부근을 경계하는 데 있어서 미국측과도 의논이 있어서 국방군을 배치하게 되면 충돌할 위험성이 많으므로 최전선에는 경찰대를 배치하고 후선에 국방군을 배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대는 사거리가 짧은 카빈총과 경기관총으로 무장했는데, 국방군은 사거리가 긴 M1총과 중기관총, 81mm 박격포와 105mm 곡사포로 무장했다. 

 

 

4. 미점령군이 후방으로 물러난 날 시작된 38도선 무력충돌

 

위에 인용한 신성모의 보고서를 보면, 당시 미점령군은 38도선 무력충돌이 전면전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경무장한 경찰대를 38도선 최전선에 배치했고, 중무장한 국방군은 경찰대 후방에 배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49년 5월 21일 국회 제3회 속기록에 따르면, 38도선 전투현장을 방문했던 국회의원 이진수는 국회에서 보고발언을 하는 중에 1949년 5월 4일 개성지구전투에서 국방군 전투부대의 공격에 밀린 인민군 전투부대가 38도선 북쪽으로 퇴각할 때, 국방군 전투부대가 추격전을 벌이려고 하자, 미점령군 군사고문 여러 명이 38도선을 넘어가지 말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추격전을 포기하고 후퇴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은 당시 미점령군이 자기들의 작전계획에 따라 자기들이 전쟁을 도발할지언정 자기들 밑에 있는 국방군이 38도선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무력충돌을 격화시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억제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70년 전의 미점령군이나 오늘의 미점령군이나 똑같다. 지금 주한미국군사령관은 자기들의 작전계획에 따라 자기들이 전쟁을 도발할지언정 자기의 작전통제를 받는 한국군이 군사분계선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무력충돌을 격화시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억제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조선인민군이 보복공격을 해도, 한국군은 제대로 반격하지 못한 채 얻어맞기만 하는 것이다. 

 

1949년 1월 15일 미점령군이 38도선 남쪽 후방지대로 멀리 물러나고, 경무장한 경찰대가 38도선 접경지에 배치되고, 중무장한 국방군이 경찰대 후방에 배치되었을 때, 인민군 전투부대들(보안독립려단과 38경비보안대대)은 38도선을 넘어와 경무장한 경찰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1949년 38도선 무력충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남측 친미극우세력의 시각에서는 북의 38도선 월선공격이 내란도발로 보였겠지만, 북측의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38도선을 철폐하고 국토완정을 실현하려는 무력투쟁이었다. 38도선 무력충돌은 얼마나 격렬했던가?  

 

1949년 4월 4일 <동아일보>가 보도한 채병덕의 담화에 따르면, 인민군 전투부대들은 1949년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한 달 동안 38도선을 넘어와 77차례 공격했다고 한다. 이것은 미점령군이 38도선 경비임무를 국방군과 경찰대에 인계하고 후방지대로 물러난 날부터 인민군 전투부대들이 38도선을 넘어오는 무력투쟁을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남측 내무부의 자료를 인용한 <동아일보> 1949년 4월 28일 보도를 보면, 1949년 3월 20일부터 4월 20일까지 한 달 동안 인민군 전투부대들은 경기도 38도선에서 연인원 1,132명이 공격했고, 강원도 38도선에서 연인원 1,410명이 공격했다. 그 기간에 38도선 무력충돌로 남측에 발생한 인명손실과 피해는 다음과 같다.  

 

경찰관 - 전사 1명, 부상 10명, 포로 2명 

국방군 - 전사 5명, 부상 9명, 포로 2명

민간인 - 사망 4명, 부상 7명, 포로 60명

경찰지서 소각 - 1개소

 

남측 공보처 자료를 인용한 <조선일보> 1949년 8월 2일 보도에 따르면, 1948년 12월 12일부터 1949년 6월 25일까지 인민군 전투부대가 38도선을 넘어와 공격한 회수는 212회이며, 공격에 참가한 연인원은 21,056명이라고 한다.

 

위에 서술한 38도선 무력충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949년 남측 언론매체들이 보도한 38도선 무력충돌상황을 보면, 38도선 전역에서 1년이 넘도록 격전이 거의 매일같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38도선 전역은 사실상 전시상태였다. 38도선 무력충돌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전투는 개성지구전투와 옹진지구전투다. 

 

 

5. 최단공격선 차지하기 위한 개성지구전투

 

1949년 당시 개성은 38도선 이남 접경지역에 속했다. 개성 북동쪽는, 해발고가 488m인 송악산이 솟아있다. 지리공간적으로 서울에 가까운 개성과 송악산은 군사전략적 요충지로 되었다. 

 

1949년 5월 4일 오전 4시 30분 인민군 전투원 약 200명이 송악산을 넘어 쑥고개를 거쳐 개성 시내 성균관 부근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경찰대가 교전을 벌였지만, 인민군 전투부대에게 밀렸다. 인민군 전투부대는 개성시 신관리 부산동을 점령했고, 오후 3시경부터 박격포를 쏘면서 신관리 서북쪽에 있는 안화사 방면으로 전선을 확대시켰다. 인민군 전투부대는 오후 4시 30분경 안화사 인근 38도선에서 남쪽으로 300m 지점에 있는 송악산 292고지를 점령한 다음, 개성 북쪽을 향해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았다. 전투현장에 증파된 국방군 전투부대가 반격전을 벌여 오후 6시경 292고지를 탈환했다. 인민군 전투부대는 오후 7시 30분경 공격을 재개할 기세를 보였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38도선 북쪽으로 퇴각했다. 


- 자료 1. 파일 -  맨위에 있음


위에 서술한 것처럼, 1949년 5월초부터 7월말까지 인민군과 국방군은 개성지구에서 치렬한 공방전을 계속했다. 개성지구전투는 최단거리축선을 차지하기 위한 무력충돌이었다. 북측 시각에서 보면, 개성-문산-파주-고양-서울로 이어지는 제1축선은 서울로 진격하는 최단공격선이고, 남측 시각에서 보면 그 축선은 평양으로 진격하는 최단공격선이다. 제2축선은 동두천-양주-의정부-서울로 이어진다. 

 

개성지구전투가 벌어졌던 때로부터 71년이 지난 지금 서부전선에 주둔하는 조선인민군 2군단 관하 전투부대들이 개성공업지구에 다시 배치된다. 북은 개성공업지구가 개발되기 직전, 그 지역에 주둔하던 조선인민군 2군단 관하 전투부대들을 후방으로 10km 이동하여 재배치했었는데, 이번에 남북공동련락사무소를 폭파하고, 조선인민군 2군단 관하 전투부대들을 개성공업지구에 다시 배치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인민군은 71년 전 무력충돌을 일으켰던, 개성-문산-파주-고양-서울로 이어지는 최단공격선을 복원하는 것이고, 서울 전역은 조선인민군 2군단 포병부대들이 조준한 대구경방사포와 대구경자행포 사정권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6. 전선을 축소하기 위한 옹진지구전투

 

1949년 당시 황해남도 옹진군, 강령군, 연안군은 38도선 이남에 속했고, 백령도도 38도선 이남에 속했다. 지도를 보면, 백령도 동쪽에 옹진군과 강령군이 있다. 옹진군과 강령군이 옹진반도를 이룬다. 옹진반도와 연안군 사이에 해주만이 있다. 옹진반도는 다른 38도선 이남지역으로부터 섬처럼 고립되었기 때문에 서울이나 개성에서 육로로 왕래하지 못했다. 그래서 국방군은 군사장비와 군수물자를 인천항에서 배에 실어 옹진반도까지 운반해야 했는데, 항로는 12시간이나 걸렸다. 

 

만일 북이 섬처럼 고립된 옹진반도를 점령하면, 38도선의 길이가 약 120km나 줄어든다. 또한 그 지역은 당시 손꼽히는 미곡생산지였다. 그러므로 북측의 시각에서 보면, 국방군과 경찰대가 방어하기 힘든 옹진반도를 점령하여 미곡생산지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옹진지구전투는 38도선 무력충돌 중에서 가장 먼저 벌어졌고,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1948년 7월 2일 인민군 전투부대는 옹진경찰서를 습격했다. 경찰대와 인민군 전투부대 사이에서 여러 시간 동안 격전이 벌어졌는데, 옹진경찰서 지서주임이 전사했다. 이것이 옹진반도에서 벌어진 첫 무력충돌이었다. 

 

1949년 4월 27일 새벽 인민군 전투부대는 옹진군 38도선을 넘어와 옹진군 교정면 비파리를 점령했다. 

4월 29일 오후 1시 50분 국방군 전투부대는 비파리를 탈환하기 위한 반격전을 개시하여 오후 6시경에 탈환했고, 현지 경찰대에게 치안을 맡겼다. 


- 자료 2. 파일 -  맨위에 있음 


8월 5일 오전 2시 국방군 2개 보병련대와 105mm 곡사포부대는 옹진지구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상륙정을 타고 인천항을 출항하여 옹진군 해안에 도착했으나,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심해 상륙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당일 오전 미군사고문단장 윌리엄 로버츠는 국방장관 신성모와 참모총장 채병덕을 불러 긴급작전회의를 진행했다. 이 작전회의에서 신성모는 옹진시가 인민군에게 점령되면, 그에 대한 보복으로 국방군은 38도선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강원도 철원시를 점령해야 한다고 미군사고문단장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미군사고문단장은 신성모의 건의를 묵살했다. 왜냐하면, 서부전선을 방어하는 국방군 병력을 옹진지구와 철원지구로 분산시키는 경우, 개성-문산-파주-고양-서울로 이어지는 제1축선과 동두천-양주-의정부-서울로 이어지는 제2축선의 방어력이 약화될 것이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인민군은 그 두 축선을 타고 서울로 진격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방군 전투부대는 인천항을 출항한 증원부대가 옹진반도에 상륙하여 합세한 덕에 인민군 전투부대를 옹진시 외곽에서 가까스로 물리치고 옹진시를 방어할 수 있었다.  

10월 14일 새벽 인민군 전투부대는 황해남도 벽성군 용정리 인근에 있는 은파산을 공격했다. 해발고가 284m인 은파산은 용정리 서남쪽에 있다. 은파산공방전은 11월 15일까지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7. 오늘의 군사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개성지구전투와 옹진지구전투는 1949년 내낸 계속된 38도선 무력충돌 중에서도 전투규모가 가장 컸고, 전투기간도 가장 길었다. 그 이외에도 경기도 장단군, 포천군, 가평군, 그리고 강원도 홍천군, 춘천 북부, 강릉군 등에서 전투가 계속 벌어졌다. 이처럼 38도선 전역에서 1년 이상 격렬히 벌어진 전투에서 국방군은 화력과 병력의 열세로 계속 밀렸다. 그래서 1949년 7월 9일 남측 치안국장은 38도선에서 남쪽으로 20km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통행제한지구로 설정했다. 

 

38도선 무력충돌의 전개양상이 또다시 반복될 리는 없지만,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이한 오늘, 군사분계선에서는 70여 년 전에 일어났던 것과 매우 유사한 무력충돌위험이 조성되고 있다. 71년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 조선인민군의 전투력은 한국군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이것은 주관적 평가가 아니라 객관적 평가다. 

 

이를테면, 2004년 9월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보좌관은 국회 본관에 있는 국방자료열람실에서 2급 군사기밀자료를 열람하고 나서 한국군이 단독으로 조선인민군과 싸우면 보름 만에 한국군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 11월 5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한 국방정보본부장은 한국군과 조선인민군이 일대일로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기느냐는 질문에 한국군이 질 것이라고 답변했다.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방어훈련이 아니라 공격훈련을 해왔고, 한국군은 공격훈련이 아니라 방어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조선인민군의 공격력은 한국군의 공격력보다 우세하다. 또한 조선인민군은 사상무장으로 단결되어 있고, 기강도 강하지만, 한국군은 사상무장이라는 말조차 알지 못하고, 기강도 무척 해이해졌다. 더욱이 조선인민군은 독자적인 작전계획과 정찰정보를 가졌기 때문에 임의의 시각에 독자적으로 전쟁을 할 수 있지만, 한국군은 미국군의 작전계획과 정찰정보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전쟁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처럼 허약한 한국군에게 보복공격을 가하는 ‘대적군사행동계획’이 지금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기획실에서 작성되는 중이다. 조선인민군 전투원들이 동해안에서 서해안에 이르는 비무장지대 북측 관할지역에 산재된 민경초소 150개소에 배치되고 있다. 군사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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