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일 중국 전승절이 전 세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북·중·러 정상이 선두에서 다극화 시대를 열고 있음이 선명히 드러나면서 급변하는 세계 질서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관심이 모인다. 이에 중국 전승절을 돌아보는 집중 기획을 준비했다.
북·중·러의 다극화 구상
북·중·러 세 나라 정상은 다극화 세계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먼저 북한을 살펴보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8월 15일 광복절 연설에서 “역사를 두고 낱낱이 잃어온 정치적 지배권을 재생해 보려는 야망 밑에 끊임없는 전쟁과 공갈 정책으로 유럽과 아시아, 나아가서 전 세계를 우경화, 일극화하려는 극히 횡포하고 무분별한 책동들을 분쇄하는 것은 평화를 사랑하고 정의에 충실한 나라와 인민들이 기꺼이 떠메야 할 역사적 임무이며 그것은 진보진영의 강력한 연대와 공동의 투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북한은 세계 진보진영의 강력한 연대와 공동 투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세력의 횡포를 분쇄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제시했다. 다극화로 가기 위한 핵심 과제가 바로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북한 언론은 국제 뉴스 가운데 브릭스(BRICS)나 상하이협력기구(SCO) 소식을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는데 이는 두 기구가 다극화 체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여기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번 중국 전승절 직전인 1일에 상하이협력기구 정상회의가 열렸고, 직후인 8일에는 브릭스 정상회의(온라인)가 열렸는데 이는 두 기구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브릭스는 전 대륙에서 골고루 참가하며 주로 경제 분야의 협력을 다룬다면, 상하이협력기구는 유라시아 중심으로 참가하며 외교·안보 분야에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다음으로 러시아를 살펴보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상하이협력기구 정상회의와 중국 전승절 행사를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가기 직전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여기서 그는 “이 세계가 일극체제라는 것은 부당하지만 명백하다”라면서 “세계는 다극화되어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일극화 세계는 끝나야 한다. 모든 나라는 평등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 이번에 있었던 상하이협력기구 정상회의와 중국 전승절 행사를 통해 “다극화 세계의 전반적인 윤곽은 드러났다”라고 말했다.
다만 ‘러시아, 인도, 중국이 다극화의 중심인가’라는 질문에는 “다극화가 새로운 패권국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 사회에서는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하며 국제법의 관점에서 볼 때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물론 인도나 중국 같은 경제대국이 있다. 러시아는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세계 4대 강국 중 하나다. 이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치나 안보를 포함한 어떤 분야에서든 누군가가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라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현실에서 다극화 세계를 주도하는 나라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주도국 가운데 하나인 러시아의 대통령 처지에서 이를 인정할 수는 없다. 주도국의 존재를 인정하면 다극화 세계 내에서 패권국이 되려 한다는 우려를 낳게 되며 그렇게 되면 주도국이 아닌 나라들이 다극화 세계에 동참하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중국을 살펴보자.
시진핑 국가주석은 전승절 기념식 연설에서 “오늘날 인류는 다시 평화와 전쟁, 대화와 대결, 윈-윈과 제로섬 게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라고 진단하면서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고, 조화롭게 살며, 서로 도울 때만 모든 국가와 민족은 공동의 안보를 유지하고, 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며, 역사적 비극의 반복을 막을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또 전승절 기념 만찬 연설에서는 “우리는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정글의 법칙으로 결코 돌아가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한편 시 주석은 상하이협력기구 플러스(SCO+) 정상회의에서 ‘세계 거버넌스 구상’(global governance initiative·GGI)를 제안해 주목을 받았다. 이 제안은 현재 유엔 중심의 국제 질서가 신흥국가, 개발도상국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하고, 일부 나라들이 결정 사항을 이행하지 않으며, 기후변화나 인공지능 등 새로운 영역을 효율적으로 담보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주권 평등 ▲국제법 준수 ▲다자주의 실천 ▲사람 중심의 접근법 ▲실천 지향성 등을 원칙으로 유엔을 개혁, 보완하자는 것이다.
박명호 북한 외무성 부상은 이 구상을 두고 “세계 각국과 함께 손을 잡고 공정하고 평등한 국제질서 수립을 추동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세 나라 정상의 다극화에 관한 구상을 종합하면 평화, 평등, 주권 존중, 국제 정의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평화, 평등, 주권 존중, 국제 정의를 파괴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따라서 반미 없이는 다극화를 이룰 수 없다.
지난 5월 9일 러시아에서 열린 중러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중러 신시대 전면적 전략 협조 동반자 관계 심화에 관한 공동성명’에 합의했다. 공동성명은 “더욱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다극화 세계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대세이며 일부 국가가 패권주의와 신식민주의에 빠져 공격적인 정책을 남발하고 자국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 타국의 주권을 제한하며 타국의 경제와 과학기술 발전을 억제하는 것은 세계 다극화와 국제 관계 민주화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미국이 중러에 대해 ‘이중 억제’를 시행하는 것에 단호히 대응할 것”이라고 하면서 ▲나토의 동진 ▲인도·태평양 전략 ▲나토와 한미·미일동맹의 ‘핵공유’와 ‘확장억제’ ▲중러를 겨냥한 핵무기 배치와 미사일방어 체계, 지상 기반 중거리 미사일 체계 배치 등을 반대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한미 핵협의그룹을 창설해 아이언 메이스 같은 확장억제 훈련을 지속하는 한국도 중러와 대립을 피할 수 없다. 한국은 북한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이라고 주장하지만 중러 입장에서는 북·중·러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미국의 전략에 동참한 것이기 때문이다.
8월 29일 아주경제는 다이빙 주한 중국 대사와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 공동 기고문을 게재했다. 두 나라의 대사가 공동 기고문을 작성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들은 기고문에서 “일부 국가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정글 법칙과 패권 논리를 펼쳐 제로섬 게임을 선동하고, 진영 대결 구도를 다시 복제하고 다른 국가의 안보를 희생하여 자신의 안보를 강화하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물론 미국, 유럽, 일본을 겨냥한 내용이다.
여기서 “진영 대결 구도를 다시 복제”한다는 건 신냉전 구도를 형성한다는 뜻이다. 즉, 중러는 신냉전 구도를 거부하며 미국, 유럽, 일본과 대립할 의도가 없다는 걸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미국, 유럽, 일본이 중러를 비롯한 다극화진영을 적대하는 이상 신냉전 구도를 피할 수는 없다. 중러는 최소한 신냉전 구도가 자신들이 의도한 게 아님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그래야 미국, 유럽, 일본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나라들도 다극화진영에 동참할 때 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은 북중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앞으로도 대만, 시짱(티베트)과 관련한 사안, 신장 및 중국의 핵심 이익과 관련된 다른 문제들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확고히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우크라이나에 관한 러시아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태도와 유사하다.
대만, 티베트, 신장 웨이우얼 등은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는 주된 소재다. 북한이 이 문제들에 관해 철저히 중국을 지지한 건 미국이 북중 사이를 이간질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