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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폐지] ⑤ 사람의 존엄성을 짓밟는 보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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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6-02-25 11:3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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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폐지] ⑤ 사람의 존엄성을 짓밟는 보안법


김 영 란 기자  자주시보 2월 24일 서울

이해찬 전 총리가 지난 1월 25일 베트남에서 별세했다. 

 

이 전 총리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오랜 시간 고생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 전 총리뿐만 아니라 김근태 전 국회의원 역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았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져야 했다.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도 고문받다가 숨졌다.

 

과거 군부독재 정권 시절 고문이 난무했다. 한마디로 야만의 시대였다.

 

군부독재 정권은 이른바 공안 사범을 연행하면 자신들이 원하는 말을 들을 때까지 고문을 했다. 고문의 종류도 상당히 다양했다. 물고문, 전기고문, 통닭구이, 관절꺾기, 거꾸로 매달아 놓기, 잠 안 재우기, 손톱 밑 찌르기 등등 심지어 성고문도 있었다.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 물을 붓거나 물통에 머리를 강제로 집어넣어 숨을 못 쉬게 하는 것이 물고문이며, 새끼발가락 양쪽에 각각 플러스, 마이너스를 연결한 뒤에 전기를 흐르게 해 심한 통증, 근육 마비, 심장마비, 호흡마비를 일으키는 것이 전기고문이다. 통닭구이는 손과 발을 묶어 막대기에 매달아 놓은 채 몽둥이로 전신을 구타하는 고문이다. 

 

사람의 존엄성을 짓밟고,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 고문이다. 

 

군부독재 정권 시기 연행된 사람 대부분은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은 유독 심했다. 영화 「1987」을 보면 온갖 조작과 고문을 주도하는 박 처장(김윤석 분)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박 처장은 ‘빨갱이 잡는 것이 애국이며 빨갱이 잡는 거 방해하면 간첩’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져 고문을 정당화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영화에 나오는 박 처장은 1987년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숨졌을 당시 치안감이었던 박처원을 모티브로 했다. 박 전 치안감은 대공 수사 전문가들로 이른바 ‘박처원 사단’을 꾸려 악랄한 고문을 주도한 인물이다.

 

▲ 영화 「1987」포스터.  

 

군부독재 정권 시절 공안사건을 담당하는 검사, 수사관들은 실제로 박처원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사건에서 고문을 악랄하게 하면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더 나아가 이들은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생각으로 고문을 했다. 부림사건을 다룬 영화 「변호인」은 고문과 조작을 정당화한 공안기관의 모습을 생생히 담았다. 

 

이 글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중에서도 심각한 고문 피해 사례를 살펴본다. 

 

김근태 고문 사건 (1985년)

 

1985년 12월 19일 열린 민청련(민주화청년운동연합)사건 첫 재판에서 김근태 전 국회의원은 모두진술을 통해 공안기관의 충격적인 고문에 대해 폭로했다.

 

아래는 김 전 의원의 모두진술 일부이다. 

 

본인은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매일)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못 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 4일 각 5시간씩 두 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 5일, 9월 6일 각 한 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13일의 금요일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 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 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중략)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 군데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 앞에 다가와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중략)

결국 9월 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 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 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당시 김 전 의원은 민청련 의장으로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시위를 주도했다. 

 

공안기관은 김 전 의원을 집시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상의 이유였고,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 이른바 대규모 간첩 사건을 만들 계획으로 김 전 의원을 잡아가 고문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와 치안본부(현 경찰)는 김 전 의원을 ‘거대한 간첩단 사건’이나 ‘폭력 혁명 모의’로 엮으려 했으며, 이를 뒷받침할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 고문을 자행한 것이다. 

 

민주화기념사업회는 김 전 의원 고문 사건에 대해 “전두환 정권은 1985년부터 1987년 정권교체기를 앞두고 장기 집권의 걸림돌이 되는 민주화 운동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삼민투로 대변되는 학생운동과 그들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민청련이 1차 타깃”, “물론 그 뒤를 이어 민통련과 민추협,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김대중 씨까지도 잡아넣겠다는 것이 그들의 시나리오”라고 서술했다.

 

이어 “그들(전두환 정권)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는 것이 국가보안법이었고, 민주화 운동을 북한과 내통하여 공산혁명을 기도하는 세력으로 용공 조작하는 것이 그들의 상투적인 수법”이라며 “용공 조작을 하기 위해서는 이근안 같은 고문 기술자를 동원해야 했다. 이러한 그들의 작전에 1차 타깃으로 걸려든 것이 민청련이고, 김근태 의장”이라고 했다. 

 

여기서 언급된 이근안은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 시기 이른바 공안사건마다 등장해 고문을 행사한 인물이다. 이근안은 ‘박처원 사단’ 중 한 명으로, 박처원이 가장 아꼈던 인물이다.

 

영화 「남영동 1985」는 김 전 의원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당했던 고문을 적나라하게 담았다. 

 

▲ 영화 「남영동 1985」홍보 사진.   

 

민족해방노동자당 심진구 사건(1986년)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1986년 12월 10일 공장 노동자이자 노동운동 활동가인 심진구 씨를 영장 없이 강제로 연행했다. 결혼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심 씨는 아내가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끌려갔다.

 

국정원은 심 씨가 북한의 지령을 받아 공산혁명을 일으킬 목적으로 ‘민족해방노동자당’을 결성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간첩으로 몰았다. 

 

안기부는 심 씨가 북한과 연계돼 있다는 자백을 확보하기 위해 물고문, 전기고문뿐만 아니라 성기에 전기 충격을 가했다고 한다.

 

아래는 오마이뉴스가 2020년 7월 5일 보도한 「피해자가 그림으로 남긴 가해자의 얼굴」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심 씨가 고문에 대해 증언한 내용이다.

 

“안기부 지하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벗으라고 해서 알몸 상태가 되자 수사관들이 달려들어 무조건 두들겨 팼다. 2시간 정도 실컷 때리고 나서 수사관이 ‘여기가 국회의원도 잡아다가 패는 데야. 옛날 중정 알아? 여기가 안기부야’라고 해서 안기부에 잡혀 온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너, 강철 시리즈 알아?’, ‘엔엘피디알(NLPDR)이 뭔지 알아?’라고 물어서 모른다고 하자 거짓말을 한다며 사정없이 몽둥이로 때렸다. 그렇게 영어가 나올 때마다 맞았다.”

 

“어느 날 정형근(검사 출신으로 안기부 대 공수사단장을 거쳐 한나라당 국회의원 역임)이 나타나서 ‘간첩이라고 불 때까지 더 족쳐’라고 수사관에게 지시하고 가기도 했다. 정형근이 왔다 간 후부터 고문은 더욱 심해졌다. 성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내려치고 몽둥이로 목을 조르기도 했다.”

 

“안기부에서 조사받는 동안 한 두 시간 정도밖에 잠을 재우지 않았고 나머지는 고문의 연속이었다. 피가 흘러나와 바닥에 고이면 고인 피를 마대 걸레로 닦아 내 손으로 짜야 했다. 6명의 고문 수사관이 야전 침대 자루로 목 조르기, 비틀기를 하고 발바닥, 머리, 가슴 등 온몸을 밤새도록 구타해서 온몸에서 피가 나고 살이 찢겨 심문실 바닥이 피범벅이 된 일도 있었다. 특히 계장이라고 하는 사람과 대머리에 눈이 치켜 올라간 수사관이 책상 모서리에서 야전 침대 자루로 성기를 수차례 내려치면서 서로 마주 보고 웃어대기도 했다.”

 

“안기부 수사관이 검찰에 가기 전에 안기부에서 말한 대로 하라고 했는데, 구치소로 가기 전에 검찰에 들러 검사 조사 받는데 안기부의 수사관들과 함께 있어서 겁을 먹어 안기부에서 시키는 대로 허위 진술한 진술서였지만 어쩔 수 없이 지장을 찍었다. 구치소 있는 동안에도 안기부 수사관들이 찾아와 검찰에서 사실을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내 사건을 담당한 신 아무개 검사에게 안기부에서의 고문 사실에 대해 말하자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며 묵살당했고, 검찰 주사보도 ‘빨갱이 좌경 분자는 더 맞아야 해’라며 거들었다.”

 

같은 기사에는 심 씨와 함께 연행된 서울대 대학생 김 모 씨가 안기부에서 고문받았다고 증언한 내용도 실렸다.

 

“안기부에서 주로 당한 고문은 각목으로 때리는 것이었다. 물고문은 나중에 당했다. 거의 매일 각목으로 얻어맞았다. 단단하고 가벼운 각목으로 다리를 집중적으로 구타해서 다리가 부어서 평소의 두 배가 될 정도였다. 다리를 때릴 수 없는 정도가 되자 왼팔, 오른팔, 어깨, 발바닥 등을 번갈아 가면서 때렸고, 입고 있던 군복에 피가 배어 오를 정도로 심하게 얻어맞았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 각목을 X자로 끼어놓고 구둣발로 짓밟고, 벽에 십자로 2시간 정도 탈진할 때까지 세워놓고 책상 밑에 처박고 구둣발로 무차별 구타하고, 구두를 벗어 그것으로 뺨을 심하게 구타하는 등 심한 기합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물고문을 받았는데, 고개를 쳐들게 하고 뒤에서 머리칼을 움켜잡고 코와 입에 수건을 덮어씌우고 주전자로 물을 퍼붓고, 물을 담아 놓은 그릇에 실신할 정도가 될 때까지 얼굴을 거꾸로 처박았다. 조서 작성할 때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안 하면 많은 기합을 받았다. 고문 수사로 자유의사는 완전히 박탈당했고 그래서 자술서도 수사관이 쓰라는 대로 작성했다.”

 

이처럼 안기부는 심 씨와 그의 동료들을 고문했으나 북한과 연루됐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안기부와 검찰은 심 씨를 간첩 혐의가 아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만 기소했다. 안기부는 ‘민족해방노동자당’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붙였으나, 실체가 없었다. 

 

심 씨는 1987년 4월 20일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고 집행 유예로 출소했다.

 

1986년은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에 항의하는 민주화 운동이 거세차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에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은 간첩 사건을 조작해 정권의 위기를 넘기려 했다. 

 

심 씨는 출소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병원에 다녀야 했으며, 심한 불면증과 불안 증세에 시달렸다. 심 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시달리다가 2014년 세상을 떠났다.

 

김제 가족 간첩 조작 사건 (1982년)

 

이 사건 역시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 시절인 1982년에 발생했다.

 

전북 김제에서 농사를 짓던 최을호 씨와 조카인 최낙전·최낙교 씨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이들의 혐의는 간첩 혐의였다.

 

공안기관은 16년 전 북한에 나포됐다가 돌아온 최을호 씨가 조카들을 포섭해 국가기밀을 수집하고 북한에 보고했다는 혐의로 사건을 조작했다.

 

이들은 남영동에 연행된 이후에 약 40~50일간 외부와 차단된 채 잔인한 고문을 받았다.

 

이들은 물고문, 전기 고문, 통닭구이 잠 안 재우기, 무차별 구타 등을 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공안기관은 이들에게 서로가 고문당하는 비명을 들려주거나 가족의 신변을 위협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은 고문으로 인해 공안기관이 준비한 ‘간첩 시나리오’대로 자백해야만 했다. 

 

이들은 검찰로 송치된 후 고문 사실을 알리며 자백을 번복하려 시도했지만, 당시 담당 검사였던 정형근은 이를 묵살했다. 더 나아가 정형근은 진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수사관들을 불렀고 이들의 구타와 고문을 방관했다. (여기서 언급된 정형근은 심진구 씨 사건에 나온 정형근과 동일 인물임)

 

1983년 3월, 1심 재판부는 최을호 씨에게 사형, 최낙전 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항소와 상고는 차례로 기각됐다. 최낙교 씨는 1982년 12월 검찰 조사받던 도중 구치소에서 사망해 공소기각 처분됐다. 

 

최을호 씨는 1985년 10월 31일 사형당했다.

 

역대로 군부독재 정권은 민주화 요구가 거세질 때마다 대규모 간첩 사건을 발표하여 국민에게 안보 위기감을 심어주었다. 

 

특히 이 사건은 “누구든 간첩이 될 수 있다”라는 공포를 심어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억누르고 사회를 통제하려 한 의도로 조작된 것이다.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1975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은 1975년 발생했다. 

 

1975년 11월 22일, 당시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 대공 수사국장 김기춘은 재일동포 유학생 13명을 포함한 21명을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재일동포 유학생은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조국의 현실을 알고 싶고 한국에 공부하러 온 젊은이들이다.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은 이런 유학생들을 북한의 사상을 주입하려 온 인물들이라며 간첩으로 만들었다.

 

재일동포 유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중앙정보부(남산), 보안사령부(서빙고), 치안본부(남영동) 등에 있는 지하 취조실에서 숱한 고문을 받았다. 이들은 짧게는 수일, 길게는 수십일에 걸쳐 육체적, 정신적 고문을 받았다.

 

이들이 받은 고문은 ▲물고문 ▲전기 고문 ▲통닭구이 ▲잠 안 재우기 ▲기타 고문(송곳으로 손톱 밑 찌르기, 몽둥이찜질, 좁은 공간에 가두는 벽관 고문 등)이었다. 

 

또 안기부는 가족이나 약혼녀를 연행해 고문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여성에게는 성적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에게 “여기서 죽어도 아무도 모른다”라고 말하며 공포감을 조성했다. 

 

공안기관이 이들에게 고문한 목적은 미리 조작해 놓은 ‘간첩 시나리오’에 맞게 자술서를 받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의 유신 체제였다. 

 

유신 체제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는 속에서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은 외부의 위협(북한 간첩)을 만들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정권 위기를 벗어나려고 대규모 간첩 사건을 조작했다. 

 

***

 

앞서 언급한 사건들은 모두 재심 등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군부독재 정권은 위기 때마다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해서, 무고한 사람을 잡아다가 고문해서 조작 사건을 만들어 자신의 집권을 유지했다. 

 

그런데 윤석열 내란세력은 군부독재 정권이 전가의 무기로 사용한 국가보안법을 절대무기로 사용했다.

 

집권 내내 반국가세력을 언급했던 윤석열은 급기야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겠다며 내란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척결 대상과 방법을 노상원의 수첩에 담았다. 대국민 학살 계획을 세운 것이다.

 

윤석열이 반국가세력 척결을 부르짖던 배경에는 국가보안법이 있다.

 

그리고 공안기관이 자행한 고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단 형태가 협박, 폭언 등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지금 극우세력은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인식으로 가득 차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막말을 일삼고 있다. 극우세력의 이런 행태 밑바탕에는 국가보안법이 깔려 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야만의 시대를 끝낼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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